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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관범의 독사신론(讀史新論)

1894년의 총성, 일본의 경복궁 습격에서 시작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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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새롭게 읽는 청일전쟁

2018년 12월 43년 만에 개방한 경복궁 서문 영추문. 1894년 일본군은 이곳을 통해 경복궁에 들어와 조선군을 무장해제시켰다. [연합뉴스]

2018년 12월 43년 만에 개방한 경복궁 서문 영추문. 1894년 일본군은 이곳을 통해 경복궁에 들어와 조선군을 무장해제시켰다. [연합뉴스]

7월의 끄트머리다. 7월은 혁명의 달이다. 우선 4일, 미국의 13개주 대표자가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14일, 프랑스의 성난 군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탈환했다. 26일, 쿠바의 카스트로 조직이 몬카다 요새를 습격했다. 차례대로 미국 혁명, 프랑스 대혁명, 쿠바 혁명의 명장면이다. 양력이 아니라 음력이지만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역성혁명도 7월이다. 17일, 이성계가 한반도의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했다. 즉위한 처음이라 아직은 고려 국왕이었고 아직은 개경 궁궐이었다.

선전포고 없이 조선군 무장해제 #동학군과 의병들이 들고 일어나 #경복궁 점령 기록 위조한 일본군 #청군 파병이 전쟁의 발단 아니야

제1차 세계대전(1914)도 7월이다. 28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했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청년에게 피살된 사라예보 사건이 원인이었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고 유럽 각국이 순식간에 전쟁에 돌입했다. 사라예보는 세계탁구선수권대회(1973)와 겨울 올림픽(1984)이 열린 유고슬라비아의 도시로 기억되기 쉽지만, 본래는 오스트리아가 합병한 보스니아의 수도였다. 보스니아 합병이 단행되었을 때 일본 내각이 한국 병합을 결의한 것은 우연의 일치였을까.

청일전쟁(1894)도 7월이다. 청일전쟁이 정확히 언제 처음 시작했는지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는데,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선전 포고가 있었던 8월 1일 이전에 이미 교전은 시작한 상태였다. 7월 25일, 조선 서해 풍도 바다에서 해전이 일어났고 사흘 후 조선 충청도 성환에서 육전이 일어났다. 유럽의 세계대전과 달리 선전 포고 전에 일본의 기습 공격으로 전쟁이 시작했다. 개전(開戰)에 관한 국제법은 러일전쟁을 겪은 러시아에 의해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1907)에서 정식화된다.

청일전쟁의 분수령 된 압록강 해전

1900년대의 영추문 모습. [사진 문화재청]

1900년대의 영추문 모습. [사진 문화재청]

청일전쟁은 세계 해전사에서 주목받는 사건이다. 청일전쟁의 주요 해전으로는 풍도 해전, 황해 해전, 위해위 해전 등이 있는데, 특히 황해 해전(압록강 하구의 대동구 해전)은 근대 철갑 화륜선 함대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해전이었다. 청나라 함대와 일본 함대를 비교하면 전자는 중포로 무장했으나 함속이 다소 느린 반면 후자는 속사포가 자유롭고 함속이 다소 빨랐다. 청나라 함대와 일본 함대는 각각 가로 정렬(횡렬진)과 세로 정렬(단종진)로 승부를 다투었는데, 일본 함대의 기동 전술이 빛을 발해 결국 청나라 함대는 패퇴했다.

황해 해전은 청일전쟁의 분수령이었다. 제해권을 장악한 일본은 수륙 양면으로 청나라 해군 기지가 있는 여순으로 향했다. 황해 해전의 피해를 복구하지 못한 청나라 함대는 산동반도의 위해위로 퇴각했고 이듬해 2월 위해위 해전에서 완전히 궤멸했다. 결국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으로서는 영광스런 전쟁이기도 했지만, 야만적인 전쟁이기도 했다. 여순을 점령한 후 일본군이 자행한 여순대학살은 중일전쟁 당시 남경대학살의 광기가 이미 청일전쟁에서 발산되었음을 의미한다.

조선 바다에서 일어난 풍도 해전은 청일전쟁에서 국제법을 논하기에 적합한 소재다. 풍도 해전 직후 울도 인근에서 발생한 영국 상선 고승호(高陞號) 격침 사건 때문이다. 풍도는 오늘날 경기도 안산에 속하지만 안산 쪽의 대부도·영흥도보다 충청도 당진 쪽의 난지도에서 더 가깝다. 풍도 해전은 충남 아산으로 가는 병력 수송선을 호위하고 회항하던 청나라 함선이 일본 함선의 공격을 받아 발생했다. 일본 함선은 추격 도중 다시 고승호와 마주쳤는데, 청나라 병력을 수송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대로 격침했다.

서양선교사 임락지가 청일전쟁의 역사를 기록한 『중동전기본말』의 번역본 표지. [사진 노관범]

서양선교사 임락지가 청일전쟁의 역사를 기록한 『중동전기본말』의 번역본 표지. [사진 노관범]

일본 함선의 고승호 격침은 국제법 위반일까. 청일 양국의 선전 포고는 아직 없었지만 풍도 바다에서 사실상 전시 상황이 됐다면, 그리고 풍도 바다에 이어 울도 바다에서 중립국 상선을 이용한 청나라 병력 이동을 확인해 이를 격침했다면, 이것은 전시 상황의 교전 행위이니 배상의 책임은 배를 격침한 측이 아니라 배를 이용한 측에 있다는 논리가 성립할 수 있을까. 그러나 풍도 바다에서 우발적인 전투가 있었다 할지라도 아직 선전 포고도, 풍도 해전 소식도 듣지 못한 중립국 선박에 전시 상황을 부과해 임의로 격침했다면 배상 책임은 격침한 측에 있지 않을까. (흥미로운 관련 논문으로 동북아역사재단 최덕규 연구위원의 ‘청일전쟁과 고승호 사건의 국제법’이 있다.)

고승호가 격침된 울도 바다는 일본 함선이 정상적인 교전권을 주장할 수 없는 조선의 바다였다. 일본이 청나라와 임의로 교전을 원한다 해도 조선이 전쟁 당사국이 아닌 이상 조선에서의 청일전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청일전쟁의 실질적인 개막으로 7월 25일 풍도 해전보다 이틀 이른 7월 23일 경복궁 점령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복궁 점령 작전은 일본이 조선에서 청일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명분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이점을 얻기 위해 감행된 것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의 최초 교전 상대는 청군이 아닌 조선군이었다. 당일 오전 0시 30분 조선 주재 일본 공사의 전보를 받고 용산 주둔 일본군 혼성여단이 움직였다. 경복궁 서문 영추문을 통해 침입한 일본군은 대략 오전 4시에서 오전 7시 사이에 궁궐 안팎에서 조선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조선 국왕을 수색한 일본군이 총검을 들고 함화당 구역에 들이닥쳐 국왕을 경호하는 조선군을 무장 해제시켰다. 왕비는 다행히 국왕과 함께 있었지만 이듬해의 시해 사건 비극은 이로부터 시작했다. 궁중 보화의 약탈도 자행됐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은 청일전쟁에서 중차대한 사건이었다. 흔히 청일전쟁이 일어난 계기로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꼽는다.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이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성을 점령한 후 조선 정부의 청군 파병 요청이 있었고 청군 파병이 일본군 파병을 유발해 결국 청일전쟁으로 치달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동학농민군이 다시 봉기한 계기로 청일전쟁의 발발을 꼽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전봉준의 공초(범죄 사실 기록)에는 일본이 선전포고 없이 조선 도성에 침입해 왕궁을 격파하고 국왕을 경동케 했기에 시골 선비와 일반 백성이 의병을 규합해 일본과 투쟁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 역사학자가 밝힌 전쟁의 전말

청일전쟁에 종군했던 프랑스 기자가 1899년 프랑스 파리에서 찍은 그림엽서. [중앙포토]

청일전쟁에 종군했던 프랑스 기자가 1899년 프랑스 파리에서 찍은 그림엽서. [중앙포토]

중국에서 활동한 서양 선교사 임락지(林樂知·Young J Allen)는 청일전쟁 기간 중국과 일본의 관련 자료와 서양의 언론 기사를 수집해서 청일전쟁의 역사책을 편찬했다. 『중동전기본말』(中東戰紀本末)이다. 이 책 ‘조경기’(朝警記)를 보면 동학농민군의 봉기와 일본군의 서울 난입을 비교해 ‘동학에 의한 조선 화란은 작고 일본에 의한 조선 화란이 컸다’고 기록했다. 풍도 해전에 대해서는 ‘일본에 의한 조선 화란에 이어 일본에 의한 청국 화란이 출현했다’고 적었다. 청일전쟁이란 일본의 조선 침략과 일본의 중국 침략을 중국이 막아내지 못한 최근의 사건이었다.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는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문제의 중요성을 일깨운 일본 역사학자다. 그는 1994년 후쿠시마 현립도서관의 사토문고에서 『일청전사』 초안을 발견했는데, 이를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공식 발간한 전사(戰史)와 비교한 결과 초안에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전말이 상세히 기록된 반면 나중에 나온 책에는 관련 사실이 누락·위조됐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메이지 일본의 조선 침략이라는 문제를 통해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환기하는 ‘메이지 영광론’을 통렬히 비판했다.

관점 있는 역사 읽기. 혁명과 전쟁의 달 7월을 보내며 역사 현장으로서의 경복궁을 다시 생각한다. 경복궁은 청일전쟁을 읽는 새로운 관점인가.

조선의 전신선부터 잘라버린 일본군

1894년 7월 23일 조선 경복궁을 향해 출발한 일본군은 가장 먼저 조선의 전신선을 절단했다. 당시 조선의 기간 전신으로는 서로전선(인천~서울~의주), 남로전선(서울~부산), 북로전선(서울~원산)이 있었다. 이 가운데 청나라가 통제한 서로전선의 통신을 두절한 것이다.

일본군은 아울러 조선의 전신국을 접수하여 남로전선과 북로전선을 통제 속에 뒀다. 또 이와는 별도로 영국의 양해를 얻어 서양 조계지를 지나는 서울~인천 구간에 군용 전신선을 가설했다. 일본군의 조선 통신 장악은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참고로 당시 동아시아에는 해저 케이블이 가설돼 신속한 통신이 가능했다. 1871년에 이미 영국의 동진 전신 회사(Eastern Extention Telegraph)가 가설한 전신 노선(영국~인도~싱가포르~홍콩)과 덴마크의 대북 전신 회사(Great North Telegraph)가 가설한 전신 노선(블라디보스토크~나가사키~상해)이 있었다. 조선의 전신은 이와 연결된 동아시아 지선의 일부분이었다.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