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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장관님의 이중생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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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정제원 기자 중앙일보 문화스포츠디렉터
정제원 스포츠본부장

정제원 스포츠본부장

쉿! 장관님은 지금 벙커에서 근무 중이다. 차관도 마찬가지다. 비상시국도 아닌데 난데없이 웬 벙커 타령이냐고. 세종시에 마련된 버젓한 사무실을 놔두고 장관은 지금 서울 도심에 마련된 벙커를 집무실로 쓰고 있다. 이 사무실이 벙커로 불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외부에 노출되면 곤란한 은밀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국가기밀은 아니지만 알려져서 좋을 일이 없다. 그래서 정부 부처의 조직 안내도에도 벙커 주소는 없다. 문화체육관광부가 그렇고, 보건복지부가 그렇다. 환경부도, 중소벤처기업부, 산업통상자원부도 마찬가지다. 1가구 2주택이 아닌 1장관 2사무실이다. 몇몇 부처가 서울사무소에 마련된 장관실을 없앴지만, 고위 공무원은 여전히 세종이 아닌 서울로 출근하는 경우가 많다.

장·차관은 오늘도 서울 벙커 근무 #‘길국장’은 출장 다니느라 바빠 #언택트 시대에 맞는 근무 필요

문화체육관광부의 벙커는 서울 용산구 청파로의 백성희장민호극장에 자리 잡고 있다. 장·차관은 거의 매일 이곳으로 출근한다. 세종시의 정부종합청사로 출근하는 건 일주일에 한 번도 채 안 된다. 이들이 세종시의 정부청사를 놔두고 서울 사무소로 출근하는 건 이유가 있다. 국회가 열리는 여의도에 가야 하고, 청와대에서 열리는 국무회의에도 참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실·국장들도 세종시를 버리고 서울에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장·차관에게 보고하기 위해 세종시와 서울을 오가는 국장과 과장이 정부 부처마다 한둘이 아니다. 서울을 오가는 출장 공무원의 수가 한 달에 5000명이 넘는다는 분석도 있다. 이들은 길바닥에서 시간을 다 보낸다는 뜻에서 ‘길국장’과 ‘길과장’으로 불린다.

서소문포럼 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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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국장’과 ‘길과장’ 문제가 나온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정부종합청사가 2012년 세종으로 옮겨간 이후 이 문제는 꾸준히 지적됐다. 행정력의 낭비를 없애기 위해 세종시에 국회 분원을 설치하자는 아이디어도 나왔지만,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운 적은 없다. 최근엔 국무조정실이 나서서 세종 주재 정부 부처의 서울사무소를 연말까지 없애라고 지시했지만, 과연 벙커를 없앨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지금처럼 국회의사당이 여의도에 자리 잡고 있는 한 정부 부처의 서울사무소를 없애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장·차관이 사무실을 비우고 서울에 머무는 날이 잦다 보니 세종정부종합청사는 매일매일이 ‘무두일(無頭日)’이다. 우두머리가 없는 날이 이어진다는 뜻이다. 일선 공무원들의 근무 기강은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 공무원의 자질과 능력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다. 그들은 근면하고 성실하다. 전쟁이 끝난 뒤 잿더미에 올라앉았던 나라를 선진국으로 끌어올리기까지는 공무원의 헌신적인 노력이 밑받침됐다. 그런데 능력·헌신과 효율성은 별개 문제다. 공무원은 산적한 업무를 수행하기만도 벅찬데 세종과 서울을 오가면서 길바닥에서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상황이 장기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민간 기업은 재택근무를 통한 효율적인 근무 방식을 연구하는데 공무원은 여전히 결재를 받기 위해 서울과 세종을 열차로 오가는 코미디가 벌어지고 있다. 더구나 장·차관과 실·국장이 모두 자리를 비우는데 과장과 사무관이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까.

당장 문화체육관광부를 보자. ‘문화’와 ‘체육’과 ‘관광’이란 이질적인 업무를 모두 관장하는 문화체육관광부는 코로나바이러스 상황에서 현안이 많다. 예술 공연이 중단되고, 체육 활동이 올스톱 됐으며 관광객이 제로에 가까워진 비상 상황이다. 더구나 최근 체육계의 고질적인 폭력 문제도 불거졌다.

국토교통부도 마찬가지다. 집값을 잡기 위해 수많은 대책을 내놨지만, 서울과 수도권의 아파트값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공무원들이 효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물론 이 모든 게 장·차관이 세종 청사를 비우고 서울에 머무는 탓이라고 말할 순 없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일수록 공무원 사회 내부의 긴밀한 소통을 통한 중·장기적인 정책 수립이 중요한 게 아닌가.

말단 공무원만 세종에서 일하고, 고위 공무원은 서울에 머무는 상황은 누가 뭐래도 비정상적이다. 비효율의 극치다. 이건 ‘언택트’ 시대의 스마트한 업무 형태와도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섣불리 수도를 세종으로 옮기자는 말이 아니다. 수도를 옮기는 일은 먼 미래를 내다보고 신중하고 장기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당장 수도를 옮기기보다는 ‘길부장’과 ‘길과장’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지 여야와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한다. 공무원들이 줄줄이 국회에 출석하는 대신 화상을 통해 회의를 진행하는 방식도 생각해볼 만하다. 언제까지 대한민국 장관과 차관은 옹색한 벙커에 숨어서 지낼 텐가.

정제원 스포츠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