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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 논설위원이 간다

목련과 거미 사랑한 남자, 모래밭을 초록낙원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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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서해안 보물’ 천리포수목원 50년

충남 서해안의 명소인 태안군 천리포수목원이 올해로 반세기를 맞았다. 활짝 핀 수국 앞에서 즐겁게 지내고 있는 관람객들. [사진 천리포수목원]

충남 서해안의 명소인 태안군 천리포수목원이 올해로 반세기를 맞았다. 활짝 핀 수국 앞에서 즐겁게 지내고 있는 관람객들. [사진 천리포수목원]

말 그대로 수국 세상이다. 분홍·파랑·보라·하양 등 형형색색의 꽃차례가 연못을 물들이고, 언덕배기를 수놓았다. 울긋불긋 꽃대궐이다. 코로나19로 무거워진 가슴이 확 트일 듯하다. 언덕 너머 서해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도 방문객의 귀를 시원하게 씻어준다.

미국 출신 민병갈, 국내 첫 수목원 #“다시 태어나면 개구리 되고 싶어” #국내 최다 1만6700종류 식물 자라 #설립 때부터 매일 식물일지 작성

지난주 초 찾아간 충남 태안군 천리포수목원 풍경이다. 수목원 입구에 ‘금주의 아름다운 식물’ 안내문이 붙어 있다. 여성미가 물씬 풍기는 미국 수국 안나벨, 꽃잎이 팝콘 모양을 닮은 수국 아예사, 낮에 꽃이 피고 밤에 오므리는 수련, 사시사철 꽃잎이 푸른 목련 태산목, 정원식물로 인기 높은 호스타 등이다. 이곳의 여름철 주인장은 뭐니뭐니해도 수국이다. 수국은 토양 성질에 따라 꽃 색깔이 바뀐다. 알칼리 성분이 강하면 분홍빛이, 산성이 강하면 푸른빛이 진해진다고 한다. 꽃말이 ‘변심’인 이유다. 천리포수목원에는 150여 종류의 수국이 자라고 있다.

설립자 민병갈 박사의 흉상과 그가 사랑한 개구리 조각. [사진 천리포수목원]

설립자 민병갈 박사의 흉상과 그가 사랑한 개구리 조각. [사진 천리포수목원]

미국 원산의 태산목도 재미있다. 영어로 ‘리틀 젬’(Little Gem), 즉 작은 보석이다. 4월 중순께 반짝 피었다가 이내 지고 마는 여느 목련과 다르게 7월부터 11월까지 계속 꽃망울을 터뜨린다. 수목원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높이 12m 남짓한 태산목 한 그루가 서 있다. 그 아래엔 작은 비석이 있다. ‘민병갈 박사의 나무’ 여덟 글자가 선명하다. 수목원 설립자 민병갈(1921~2002) 박사의 마지막 자취다. 민 박사는 “내가 죽으면 묘를 쓰지 말라”고 당부했으나 타계 당시 수목원 안에 작은 묘를 만들었다가 2012년 4월 유골을 수습해 이 나무 아래에 수목장을 지냈다. 한 뼘만한 묘목이 어느덧 큰 나무로 자라 민 박사를 지키고 있다.

한국에 있는 나무 1200종류 망라해

하늘에서 내려다본 수목원 전경. 왼쪽 낭새섬도 수목원의 일부다. [사진 천리포수목원]

하늘에서 내려다본 수목원 전경. 왼쪽 낭새섬도 수목원의 일부다. [사진 천리포수목원]

목련은 천리포수목원의 얼굴과 같다. 세계에 약 1000종류(전문용어로 분류군, 종·아종·변종·재배종·교잡종 포괄)의 목련이 있는데, 천리포에 865종류가 자라고 있다. 목련의 거의 모든 것을 구비한 셈이다. 김용식 천리포수목원장은 “열대지방에 있는 것을 빼고 다 있다고 보면 된다. 민 선생이 목련을 각별히 사랑한 까닭도 있지만 이만큼 모으고 키운 건 대단한 일이다. 올 4월에 국제목련학회 행사를 열려고 했으나 코로나19 사태로 무산이 됐다”고 했다.

천리포수목원이 지난달 말 설립 50주년을 맞았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수목원으로 꼽힌다. 1990대부터 국내에도 수목원·식물원 조성이 늘어나기 시작해 현재 전국에 70곳 가까이 있지만 수목원 이름을 달고 본격 활동을 한 곳은 천리포가 처음이다. 경기도 광릉 국립수목원이 공식 개원한 때가 1999년 5월이다.

천리포수목원은 알려진 대로 1970년 미국인 민병갈(본명 칼 페리스 밀러, 1979년 귀화) 박사가 일구기 시작했다. 바닷가 사구(砂丘), 해송 몇 그루만 있던 불모지를 차례차례 사들여 지금의 ‘녹색 낙원’을 빚어냈다. 한국은행 고문, 증권사 펀드매니저로 일한 민 박사는 주중엔 서울, 주말엔 천리포를 오가며 모래밭을 일구고, 나무를 심으며 ‘제2의 조국’ 한국에 수목원을 기증하고 떠났다. 원래 일반인 출입이 제한된 ‘금단의 영역’이었으나 2009년 3월부터 운영비를 보태려 일부 개방하고 있다. 전체 60만㎡ 가운데 6만5000㎡를 단장해 선보인 ‘밀러가든’이다. 탐방객 길을 새로 내고, 편의시설과 게스트하우스를 갖췄다.

1970년대 초반 수목원 조성 당시의 모습. [사진 천리포수목원]

1970년대 초반 수목원 조성 당시의 모습. [사진 천리포수목원]

규모·시설 측면에서 천리포를 넘어선 수목원은 이제 적지 않다. 반면 수목원 본연의 기능을 따지면 아직 천리포만한 곳도 없다. 첫째, 식물의 다양성이다. 올 1월 기준 나무와 풀을 합해 1만6763종류를 보유하고 있다. 국내 최다 기록이다. 국립수목원도 이에 미치지 못한다. 특히 국내에 서식하는 나무 1200종류를 망라했다. 바닷가 온화한 곳에 있어 한반도 전역의 나무가 고루 자랄 수 있는 기후적 특성 덕분이다.

둘째, 선택과 집중이다. 목련 865종류와 더불어 동백나무 1044종류, 호랑가시나무 548종류, 무궁화 334종류, 단풍나무 251종류가 있다. 무궁화의 경우 우리 땅에 사는 모든 것을 수집했다. 크리스마스트리로 애용되는 호랑가시나무도 이곳의 자랑거리다. 셋째는 국제교류다. 전 세계 33개국, 315개 기관과 식물 종자 교환 프로그램을 운용하고 있다. 식물 연구·보존·보급의 기초 작업이다.

관람객이 완상하는 나무와 꽃은 사실 천리포수목원의 드러난 모습이다. 그 아름다운 자태 뒤에 숨은 시스템이 주목된다. 70년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록해온 일지다. 매일매일 기상 데이터와 식물 식재 상황, 그날의 주요 사건 등을 적었다. 수목원의 어제와 오늘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모든 나무와 풀의 이력카드도 작성했다. 사람으로 치면 가족기록부쯤 된다. 최창호 부원장은 “다른 수목원과 달리 이곳의 모든 나무 표찰에는 도입 연도·순서가 적혀 있다. 국내에 이런 곳이 없다”고 말했다.

10개월 과정의 전문인력 양성도 중점사업이다. 76년부터 지난해까지 360여 명을 배출했다. 현재 국내 수목원·식물원에서 일하는 수많은 이들이 이곳 출신이다. 실습교육이 부족한 대학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다. 천리포 외부에서도 이 대목을 높게 평가한다. 이유미 국립세종수목원장은 “나무와 꽃을 키우는 주체는 사람이다. 천리포는 국내 식물원 종사자들의 산실이자 고향 같은 곳”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 360여 명 배출, 곳곳서 활약

민병갈 박사

민병갈 박사

민병갈 박사는 생전에 한국의 생태적 다양성에 반했다. “한국은 땅은 작지만 식물 다양성은 놀랍다. 일본과 다르고, 중국과 다르다. 그런 식물들이 경제개발에 따라 사라지는 게 안타까웠다. 내가 젊음을 보낸 한국에 식물의 피난처를 만들고 싶었다. 수목원은 관광객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아닌 식물이 주인이다. 내 최종 목표는 생물 보존이다.”

이 수목원 고규홍 이사도 자연존중, 생명사랑에 방점을 찍었다. “민 박사는 나뭇가지 하나, 거미줄 하나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새벽 산책 중에 거미줄을 만나면 몸을 숙이거나 옆으로 돌아갔어요. 밤새워 일한 거미의 노동을 망가뜨릴 수 없다는 겁니다. 평소 개구리를 좋아해 다시 태어나면 개구리가 되고 싶다고 했죠. 그게 천리포 정신입니다. 코로나19로 예년보다 방문객이 40% 넘게 줄었지만 그 정신을 새로운 50년의 출발점으로 삼겠습니다.” 민 박사가 잠든 태산목 바로 곁에 민 박사 흉상이 보인다. 그 흉상 앞에 개구리 돌조각이 놓인 이유를 알겠다. 연못에서 들려오는 개굴개굴 소리가 새삼 싱그럽다.

천리포 1호 교육생 “새로운 50년 열겠다”

김용식 천리포수목원장

김용식 천리포수목원장

“1974년 육군 일등병 시절 휴가 때 이곳에 처음 왔으니 천리포와의 인연도 올해로 47년째입니다. 식물학자로서의 모든 게 천리포에서 비롯했다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닙니다.”

김용식(69·사진) 천리포수목원장의 사무실에는 창립자 민병갈 박사가 좋아한 ‘텅 빈 마음 꽉 찬 마음’ 문구가 걸려 있다. ‘깊은 산 향풀도 제 스스로 꽃다웁고/삼경 밤 뜬 달도 제멋대로 밝삽거늘/하물며 군자가 도덕사업 하여갈 제/세상의 알고 모름 그 무슨 상관이랴.’

김 원장도 늘 이 구절을 안고 산다. 그는 천리포수목원 전문가 양성 프로그램 1기생 출신이다. “76년 제대 직후 실습생으로 들어왔어요. 저 혼자밖에 없었죠. 그때 들여온 묘목을 일일이 심으며 학명을 반복하다 보니 절로 외우게 됐어요. 당시 천리포에는 대학에 없던 전공 서적이 많았어요. 밤새 읽고 또 읽었습니다. 학문의 자양분이 된 것이지요.”

전북대 임학과·서울대학원 임학과를 나온 김 원장은 영남대에서 34년 재직한 후 2018년 오늘의 그를 만든 천리포로 돌아왔다. 이를테면 귀향인 셈이다. “수목원이 50주년을 맞았으나 외국에 비하면 신생아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탈리아 피사대학 식물원은 1543년 설립됐어요. 민 전 원장도 200~300년 후를 내다보고 시작했습니다.”

김 원장의 목표는 인재 양성과 경영 안정이다. “천리포도 앞으로 50년, 아니 500년은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을 키우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재정도 뒷받침돼야 하고요. 세계에 내놓을 수목원 하나쯤 갖추는 것, 이런 것도 분명 국격을 높이는 일이지 않을까요.”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