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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같은 선방’과 ‘좋은 노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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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결국 그거였다. 한국판 뉴딜이란 것도 뚜껑을 여니 ‘인형 눈알 붙이는’ 땜질 일자리였다. 첫 실행 프로그램이 ‘데이터 댐’ 구축을 위한 인력채용이었다. 디지털 뉴딜 방안으로 내놓은 인공지능(AI)과 소프트웨어(SW) 핵심인재 10만 양성계획의 일환이다. 무려 8000명이다.

22년만에 최악 역성장 한 한국 #기업이 ‘현 상황 만족한다’는 독일 #그 차이는 숙성된 개혁 정책 유무

한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허탈하다. 3개월 시한부 행정인턴이다. 월급은 180만원. 하는 일은 기가 찬다. 엑셀 같은 프로그램으로 자료를 정리하는 단순작업이다. 이걸 한국판 뉴딜의 ‘핵심인재 양성’으로 볼 사람이 있을까. 예산이 소진되면 사라지는 일자리다. 아르바이트가 더 적절해 보인다. 뉴딜을 빙자한 실적 올리기 의심이 들 정도다. “엑셀로 작업하는 이거요? 한국판 뉴딜 맞아요. 디지털 아닙니까”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빈 강의실 불 끄기, 그거 청년 일자리입니다. 대학생에게만 주는 일감 아닙니까”와 다를 바 없다.

한국판 뉴딜의 상당 부분은 일자리와 연결된다. 고용노동정책이 핵심이란 얘기다. 고용노동정책은 논의와 숙고를 거쳐 숙성해야 한다. 그래야 부작용이 없고, 경제에 미치는 효과도 강력하다. 한국판 뉴딜처럼 뚝딱 나오는 게 아니다. 3년 동안 쏟아지듯 나온 이념형 정책에 고초를 겪고 있지 않은가.

독일은 숙성 정책의 좋은 본보기다. 27일자 독일 슈피겔(Spiegel)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뮌헨 소재 ifo연구소가 기업환경지수를 조사했더니 전월보다 4.2포인트 상승한 90.5를 기록했다. 4월 최저치인 74.2포인트 이후 3개월 연속 상승이다. 기업은 전반적으로 현재 상황에 만족한다고 했다. 다만 미래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워 했다.” 클레멘스 푸에스트(Clemens Fuest) 연구소장은 “독일 경제가 회복세에 돌입했다”고 진단했다. 이달 초에는 “코로나19 여파에도 고용이 안정된, 작은 노동시장의 기적을 독일이 경험하고 있다”는 보도(디 벨트)도 있었다.

서소문 포럼 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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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게 ‘기적 같은 선방(善防)’이다. 어디를 봐서 한국이 ‘기적 같은 선방’을 했다는 것인지 문재인 대통령의 인식에 이해가 안 간다. 22년만의 최대 마이너스 성장이란 성적표를 받았다면, 부끄러워하고 위기의식을 느끼는 게 정상이다. 비정상의 정상화가 필요하다는 말이 안 나오는 게 기적이다.

독일 경제가 견실한 건 특별한 비법이 있어서가 아니다. 체질 개선을 꾸준히 해 온 덕이다. 특히 노동시장에서의 개혁을 통해서다. 독일은 2003년 하르츠 개혁을 시작해 ‘아젠다 2010’을 거쳐 하르츠4 개혁까지 이어지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기업의 법인세 부담, 실업보험에 대한 기업 부담분, 노조의 경영참여를 축소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최근엔 디지털 경제에 대비할 노동개혁에도 착수했다. ‘노동 4.0’이란 용어를 붙였다. 2015년 4월 ‘노동 4.0 녹서(Green Paper)’를 냈다. 녹서는 이해관계자들이 토론하고 논의·연구해야 할 주제를 담은, 일종의 정책 사전 검토서다. 4차 산업혁명기에 노동시장에 발생할 현상과 현 제도의 문제, 보완할 점 등이 망라됐다. 이 녹서를 놓고 논의가 2년 동안 이어졌다. 그 결과물이 2017년 1월 ‘노동 4.0 백서’로 나왔다. 독일 연방 노동사회부가 발간했다.

서문에 이렇게 적혀있다. “하루 8시간, 근무조건 개선, 아동노동 금지 등이 이상형으로 그려지던 때가 있었다. 오늘날은 다르다. 시원한 바닷가에 앉아 노트북을 무릎에 올리고 일하는 창의적인 지식 노동자, 혹은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원하는 작업 스케줄을 짜는 생산직 노동자가 이상형이 됐다.” 그러면서 말미에 “노동 4.0 백서는 ‘좋은 노동(Gute Arbeit)’을 만드는 토대를 제시한다”고 썼다. ‘좋은 일자리’가 아니라 ‘좋은 노동’이란 개념을 강조했다. 유연한 노동시장, 질 높은 교육, 수평적 경영문화, 역량 부합형 임금체계, 촘촘한 사회안전망을 ‘좋은 노동’을 위한 방향으로 제시했다. 요컨대 좋은 일자리를 위한 자율적이고 유연하며 질 높은 노동, 유사시에도 생계 걱정 없는 안전한 사회를 지향한다.

디지털 시대 뉴딜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고민과 토론, 미래 비전도 없이 돈을 퍼붓는 듯한 정책에 뉴딜이란 말을 붙인다고 경제 체질이 개선되거나 강해질 리 없다. ‘노동 4.0 백서’는 지금 정상이라고 여기는 게 미래에는 비정상이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미래의 눈으로 보면 1970~80년대 노동정책에 사로잡힌 요즘 한국이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보일까. 미래를 내다보는 ‘좋은 노동’을 정부가 해주길 바라는 이유다. 그래서 진짜 기적 같은 일을 후세대는 누렸으면 한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