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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대가로 건너온 프랑스 꽃병…구한말 왕실 식탁 돌아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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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열린 '신(新) 왕실도자, 조선왕실에서 사용한 서양식 도자기' 언론공개회에서 근대기 빛의 시대로 진입했음을 보여주기 위한 연출 공간에 오얏꽃 무늬 유리 전등갓 등 유리 등갓들이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

28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열린 '신(新) 왕실도자, 조선왕실에서 사용한 서양식 도자기' 언론공개회에서 근대기 빛의 시대로 진입했음을 보여주기 위한 연출 공간에 오얏꽃 무늬 유리 전등갓 등 유리 등갓들이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

전시장 들머리에 장식된 150여점의 유리 전등 갓이 꽃 모양, 통 모양, 연꽃봉오리 등 다채롭다. 오얏꽃(이화) 무늬가 선명한 이들은 모두 개항기 조선 왕궁을 밝혔던 유물들이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조선은 근대국가로 거듭나기 위해 서양문물을 적극 수용했다. 그 시발점이 된 게 ‘빛’이다. 1883년(고종 20) 미국을 방문한 보빙사(우호사절단) 일행은 밤거리를 환히 밝힌 전등을 보고 국내 설비를 건의했다. 1887년 경복궁 후원의 건청궁에 한국 최초의 전등이 불을 밝혔고 각 궁궐은 형형색색의 전등 갓으로 가득 차게 됐다.

경복궁 내 고궁박물관 '신왕실도자' 전시 #프랑스 수교 기념 선물 대형화병 등 선봬

28일 언론에 공개된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의 기획전 ‘신왕실도자, 조선왕실에서 사용한 서양식 도자기’가 이처럼 전등 갓을 앞자락에 내세운 이유는 명백하다. 외세의 거센 개항 압력을 ‘역사의 비운’으로 해석하기보다 이에 맞춰 변화했던 조선 왕실과 우리 삶의 양식을 구체적으로 되돌아보자는 의도다. 불과 100여년전엔 상상하기 힘들었던 오늘날의 식탁이 처음에 어떻게 뿌리내리고 점차 변화해갔나 이 전시로 엿볼 수 있다. “(현대) 문물이 어느 시점에 우리에게 뚝 떨어진 게 아니다”(임경희 고궁박물관 학예연구관)라는 취지대로다.

28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열린 '신(新) 왕실도자, 조선왕실에서 사용한 서양식 도자기' 언론공개회에서 전시 관계자들이 일본, 중국 등에서 온 수입 화병 등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연합뉴스]

28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열린 '신(新) 왕실도자, 조선왕실에서 사용한 서양식 도자기' 언론공개회에서 전시 관계자들이 일본, 중국 등에서 온 수입 화병 등 전시물을 관람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선왕실에서 사용한 서양식 식기 차림.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오는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열리는 특별전 '新(신)왕실도자, 조선왕실에서 사용한 서양식 도자기'에서 만날 수 있다.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왕실에서 사용한 서양식 식기 차림.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오는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열리는 특별전 '新(신)왕실도자, 조선왕실에서 사용한 서양식 도자기'에서 만날 수 있다.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이에 따라 개항기부터 대한제국 멸망 때까지 조선 왕실이 사용하던 식기류가 한자리에 모였다. 용준(龍樽), 즉 용무늬가 그려져 있는 큰 백자 항아리와 모란무늬 청화백자 등 전통의 청화백자부터 왕실이 수입해 쓰던 프랑스·영국·독일·일본·중국산 도자기까지 총 310건 400점이다. 식기뿐 아니라 손과 발을 씻는 용도의 위생용 도자기 등도 선보인다. 빌레로이앤보흐(독일)·노리다케(일본)·아빌랑(프랑스) 등 요즘도 인기인 글로벌 명품 브랜드가 즐비하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게 전시장 중심부에 배치된 ‘백자 채색 살라미나 병’. 프랑스 국립세브르 도자제작소에서 제작한 대형(높이 62.1㎝) 장식용 화병으로 조불수교(1886)를 기념해 프랑스 사디 카르노 대통령이 고종에게 선물했다. 담대한 형태와 화려한 꽃무늬가 당시 프랑스의 문화적 자부심을 대변하는 듯하다. 조선은 서양 열강의 압력 속에 수교를 잇달아 맺었지만 기념 예물을 받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28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新왕실도자, 조선 왕실에서 사용한 서양식 도자기' 언론공개회에서 백자 채색 살라미나 병이 공개되고 있다. [뉴스1]

28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新왕실도자, 조선 왕실에서 사용한 서양식 도자기' 언론공개회에서 백자 채색 살라미나 병이 공개되고 있다. [뉴스1]

프랑스는 살라미나 병 외에 백자 채색 클로디옹 병도 한쌍 선물했다. 덕수궁 석조전 2층 로비에 장식돼 있던 이 병들은 현재 일본 프린스호텔이 소장하고 있다. 곽희원 학예연구사는 “영친왕(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이 일본으로 건너갈 때 가져갔다가 1950년대 저택 소유권이 넘어가면서 현재 호텔 장식품이 된 상태”라고 전했다.

고종도 답례 선물을 보냈다. 12~13세기 고려청자 두 점과 ‘반화(盤花, 금칠 나무에 각종 보석으로 만든 꽃과 잎을 달아놓은 일종의 장식용 분재)’ 한 쌍이다. 고궁박물관 측은 3년 간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고종의 답례품을 프랑스로부터 대여하기로 합의했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못 가져왔다고 한다. 김동영 고궁박물관장은 “코로나 사태가 호전되는대로 별도 전시를 통해서라도 꼭 소개하겠다”고 밝혔다.

개항 이후 서양식 정찬을 즐길 때 사용된 조선에서 주문 제작한 필리뷔트 양식기가 디지털 영상과 접목돼 전시되는 모습.[연합뉴스]

개항 이후 서양식 정찬을 즐길 때 사용된 조선에서 주문 제작한 필리뷔트 양식기가 디지털 영상과 접목돼 전시되는 모습.[연합뉴스]

최근 박물관의 AR·VR 트렌드에 맞춰서 이번 전시에도 시청각을 즐겁게 하는 디지털 기술이 접목됐다. 4부 ‘서양식 연회와 양식기’에선 조선왕실의 연회 식탁을 차려놓고 천장에 달린 프로젝터를 통해 영상을 매핑(mapping)해 당시 연회 분위기와 정찬 코스를 엿볼 수 있게 했다. 푸아그라 파테, 안심 송로버섯구이, 꿩가슴살 포도 요리 등 당시 연회에 차려지던 12가지 프랑스식 정찬이 마치 실제처럼 필리뷔트 양식기에 펼쳐진다. 창덕궁 대조전 권역에 남아 있는 서양식 주방을 그대로 옮긴 구조에 ‘철제 제과틀’ 등 각종 조리용 유물도 전시돼 있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고종은 외국인을 위한 연회를 외교의 중요 수단으로 생각했다”면서 “조선왕실이 개화의 길로 나서는 데 굉장한 노력을 기울였던 역사를 이번 기회에 엿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10월 4일까지.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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