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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브레이크 없는 권력의 폭주, 민주주의의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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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주필

이하경 주필

문재인 정부의 특징은 ‘말 따로 행동 따로’다. 아쉬울 때 내뱉었던 약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파기하고, 뒷감당이 안 되는 일을 새로 시작한다. 힘이 세졌다고 주권자인 국민을 우습게 아는 오만한 권력이다. 민주주의의 위기다.

산 권력과 맞선 윤석열 단죄하라? #제왕적 대통령 권력 전제군주화 #민주화 정권, 민주주의 위기 초래 #권력 행사에도 절제가 필요하다

힘이 빠진 윤석열 검찰총장을 잡아들이라는 호령이 도처에서 들린다. “윤석열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1호 수사 대상”이라는 기괴한 주문(呪文)이 실제 상황이 되는 것일까. 윤석열은 두 명의 대통령, 한 명의 대법원장, 네 명의 국정원장을 포승줄로 묶어 줄줄이 옥(獄)에 보낸 ‘저승사자’였다. 그뿐인가. 박근혜 정권 때 국정원 댓글조작 사건의 뿌리를 뽑으려다 유배됐던 ‘진짜 검사’가 아니었던가.

문 대통령은 “우리 윤 총장님”에게 권력에 휘둘리지 말아 달라고 했다. 시킨 대로 대통령의 복심(腹心) 조국을 정조준하고 정경심을 감옥에 넣었더니 대역죄인이라며 형장(刑場)으로 떠민다. 대통령의 진심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공수처가 무엇인가. 하이에나처럼 죽은 권력의 시체만 물어뜯지 말고 시퍼렇게 살아 있는 권력을 성역 없이 수사하라고 만든 기관이다. 그런데 눈치 안 보고 살아 있는 권력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룬 칼잡이가 미워졌다고 검찰개혁의 상징이라는 공수처를 앞세워 죽이겠다는 것이다. 앞뒤가 다르지 않은가.

살아 있는 권력의 환부를 도려내는 것이 지상과제라면 문 정부는 왜 특별감찰관을 3년 넘도록 공석으로 남겨두었는가. 특별감찰관은 대통령의 배우자와 4촌 이내 친족, 비서실의 수석비서관 이상 공무원의 비위를 찾아낸다. 초대 이석수 특별감찰관은 박근혜 정부 실세인 우병우 민정수석의 비리 의혹을 감찰하려다 충돌했다. ‘제2의 이석수’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면 조국 사태, 유재수 감찰 무마, 울산시장 하명수사라는 권력형 비리 의혹은 초기에 차단됐을 것이다. 특별감찰관을 임명하지 않으면서 살아 있는 권력을 잡겠다고 공수처를 만드는 것은 모순이다.

행정수도를 세종시로 옮긴다는 천도(遷都)는 또 어떠한가. 국가 백년대계인데 수도권 집값을 잡겠다고 불쑥 끄집어냈다. 16년 전 위헌 결정이 난 일을 사전 검토와 공론화 과정도 없이 밀어붙인다. 대통령은 청와대에 있는 집무실을 불과 수백m 떨어진 광화문으로 옮기겠다는 ‘대선 1호 공약’도 안 지켰다. 그런 정권이 개헌해서 행정수도 이전을 성사시킬 수 있을까. 수도권 과밀화 해소와 국토 균형발전은 필요하지만 졸속 접근은 문제가 있다. 행정수도 이전 공약으로 “재미 좀 봤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따라 한 대선용 카드인가.

이런 모순과 난맥에 대한 여권 내부의 문제제기는 전무하다. 18개 상임위원장직을 여당이 모두 차지한 입법부는 기형적 독식 체제가 돼버렸다. 정부 견제가 어렵다. 비판자가 돼야 할 시민단체와 지식인도 권력의 일부분이 된 지 오래다. 여권은 참여연대를 만든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정의연대를 이끈 윤미향 의원의 일탈과 비리를 감싸고 있다. ‘권력과 양심의 교환’이라는 더러운 유착관계를 폭로하는 증거다. 불가근(不可近)이어야 할 권력과 시민사회가 일체화하면서 정치적 다원성과 공론장은 소멸하고 있다. 브레이크 없는 대통령 권력의 폭주가 가능해진 배경이다.

공수처는 무서운 부패 수사기관이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광역단체장과 판검사 등 권력자와 그 가족의 범죄를 수사한다. 검찰과 경찰은 범죄 사실을 안 즉시 공수처에 통보해야 한다. 생사여탈권을 거머쥔 공수처장이 사실상의 권력 2인자가 될 것이라고 한다.

대통령은 7명의 추천위원 가운데 6명 이상이 찬성한 두 사람중 한 사람을 공수처장으로 임명한다. 야당인 미래통합당 몫은 두 사람이어서 추천 과정에서 비토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런데 여권은 미래통합당 몫을 한 사람으로 줄이는 법 개정을 하겠다고 한다. 대통령은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공수처장으로 임명할 수 있게 된다. 검찰총장은 종이호랑이가 될 것이다.

공수처가 살아 있는 권력이 아닌 야당과 반대자를 결박(結縛)하면 존재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다. 원로 진보정치학자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강력한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의 대통령중심제는 원천적으로 전제정(專制政)의 위험을 안고 있다”며 “공수처법은 대통령을 위한 법이 될 위험성이 높아서 대통령의 전제정화를 제도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과거 민주화 세력이 중심 세력인 문 정부가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역설적 상황을 불렀다. 이쯤에서 위험한 폭주를 멈추고 숙고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제왕적 권력의 행사를 절제하고  헌법적 가치인 입법·행정·사법의 분립 원칙을 지켜야 한다. 3권분립은 상호견제와 균형을 유지시켜 국가권력의 집중과 남용을 방지하는 공법의 보편적 통치조직원리가 아닌가.

민심은 지지 철회를 통해 오만한 정권에 경고등을 켜고 있다. 대통령 임기가 2년도 남지 않았다. 실정(失政)을 또 다른 실정으로 덮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민주주의를 살려야 한다.

이하경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