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한끼

유리 파편 ‘물성’의 화가 곽인식, 할매곰탕 고향의 맛 만끽

중앙선데이

입력 2020.07.25 00:21

지면보기

696호 26면

예술가의 한끼

일본 현대미술의 아방가르드로 통했던 곽인식은 한국 미술인들에게도 큰 자극이 됐다. [사진 갤러리현대]

일본 현대미술의 아방가르드로 통했던 곽인식은 한국 미술인들에게도 큰 자극이 됐다. [사진 갤러리현대]

선명한 얼굴선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장발에 단단하고 큰 덩치, 일본에서 활동했던 한국인 작가 곽인식(1919~1988)은 외모부터가 압도적이었다. 곽인식은 대구 근방 현풍 출신이다. 현풍 곽씨 집성촌이 그의 고향이다. 부친이 현재의 현풍고를 세울 정도로 가세가 컸다.

현풍 출신으로 일본서 미술 배워
귀국했다 1949년 다시 일본 밀항

60년대 초 실험적 물성작업 몰두
일본 ‘모노하’ 미술운동 선구 논란

길옥윤, 이타미 준 등과 잘 어울려
82년 귀국, 국내 미술계에 큰 자극

1934년 현풍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곽인식은 상경해 YMCA 중등부를 다녔다. 선천적으로 뛰어난 신체를 살려 권투에 매진했다. 1937년 도쿄 일본미술학교 예과에 입학해 본과까지 마쳤다. 전쟁으로 어수선한 도쿄를 떠나 1941년 고향으로 돌아와 첫 개인전을 대구 미나카이(三中井)백화점에서 열었다.

수원중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중 해방을 맞아 고향 현풍으로 돌아왔다. 밀항선을 타고 다시 일본으로 들어간 건 1949년. 그리고 1982년이 되어서야 고국의 땅을 다시 밟을 수가 있었다. 일본으로 간 곽인식은 2년간의 고베 생활을 거쳐 도쿄에 정착했다. 종전 후의 도쿄는 폐허나 마찬가지였다. 우에노 아메요코 암시장에서 미군보급품을 사다가 웃돈을 얹어 되파는 방식으로 생활을 꾸려 나갔다. 창작활동을 위해 다시 찾은 일본이었기에 힘든 상황 속에서도 화업은 꾸준하게 이어졌다.

깨진 유리판 틈새로 조선의 교양 스며

청년시절의 곽인식(앞줄)이 서양화가 임직순(뒷줄 왼쪽), 임규삼(뒷줄 가운데)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 갤러리현대]

청년시절의 곽인식(앞줄)이 서양화가 임직순(뒷줄 왼쪽), 임규삼(뒷줄 가운데)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 갤러리현대]

곽인식은 도쿄에 머물던 음악평론가 박용구(1914~2016)와 친했다. 도쿄의 공연정보를 훤하게 다 꿰고 있는 박용구를 따라 연주장과 무용 공연장을 다녔다. 그러다가 1957년, 평생의 반려자가 되는 발레리나 오마타 사토코(小俣智子)를 만났다. 곽인식은 몇 년 후 오기쿠보(荻窪)에 있는 그녀의 거처로 몸을 옮겼다.

곽인식을 인상적인 작가로 기억하게 만든 건 1960년대 초반의 실험적인 물성작업들이다. 오기쿠보에서 도쿄 시내로 나오려면 중앙선 전철을 타고 신주쿠(新宿)를 거치게 마련이다. 1964년에 열린 도쿄올림픽이 가까워지자, 이제까지 황량하기만 했던 신주쿠에 우후죽순 신축 고층빌딩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초현대식 건물에 어울릴 만한 새로운 건축자재로 대형유리판이 등장했다.

고향 현풍의 탱탱한 가을 햇살을 숨 쉬듯 반은 내뱉고 반은 삼키던 창호지문, 자라면서 본 대구와 서울의 자그마한 유리창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대형 유리판이었다. 서구의 근대를 열었던 데카르트의 균질공간을 형상화한다면 아마도 이런 큰 유리판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곽인식은 유리판을 깨어 균열의 흔적을 작품으로 끌어들였다. 유리판의 깨짐은 곧 공간의 깨짐이자 장소의 드러남이었다. 서구의 근대를 연 균질공간의 층이 깨어지고 갈라진 틈 사이로 대대손손 문화유전자에 스며든 조선의 교양과 사유가 비집고 들어갔다.

일본의 1940년대 초반생 작가들이 중심이 돼 나중에 일본현대미술의 주요한 미술운동이 되는 모노하(物派)를 탄생시킨 건 1960년대 말에 와서다. 이 때문에 곽인식을 일본 모노하의 선구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들과는 20년 이상의 연령 차이로 인해 모노하와 무관한 작가로 보는 견해 또한 있다. 그 시비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다만, 그의 물(物)에 대한 탐구를 서구의 물질이나 일본의 모노가 아닌 그의 풍토적 교양인 격물치지(格物致知), 신외무물(身外無物)의 물(物)에서 출발해 볼 필요는 있다. 곽인식의 생래적이고도 지배적인 세계관이었던 성리학적 세계관의 중요한 키워드인 수신(修身)에서, 신(身 metaphysical body)은 체(體 physical body)와는 달리, 부단한 수양(修養)을 통해 장소를 떠나 공간으로 향할 수 있는 가능태다. 즉 체를 무화시켜 신이 공간으로 나아가는 게 수신의 방식이다. 신(身)이 물(物)에 동등한 레이어에서 대응한다는 점을 암시하는 신외무물(身外無物)의 물(物), 또 물(物)이 깨침의 지경으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다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물(物)에서 곽인식의 물성작업은 이해될 수도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물성작업은 일본의 모노하와 변별된다.

곽인식의 ‘85-BG’(1985), 종이에 채색 96.5x180㎝. [사진 갤러리현대]

곽인식의 ‘85-BG’(1985), 종이에 채색 96.5x180㎝. [사진 갤러리현대]

곽인식은 작곡가이자 연주가인 길옥윤(1927~1995), 건축가 이타미 준(한국명 유동룡·1937~2011) 등과 친했다. 14년간 그의 조수로 일한 바 있는 우에다 유조(上田雄三·1951~ )는 죽음의 순간까지 그의 곁에 있었다. 곽인식이 1983년 도쿄 긴자에 개관한 갤러리Q를 물려받은 우에다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미술기획자로 활동이 여전히 활발하다.

이타미 준은 도쿄 아오야마(靑山)에 토랑쿠(trunk)라는 일본식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여동생과 함께 경영하고 있었다. 토랑쿠는 곽인식을 비롯한 미술인들의 아지트였다. 초창기 모노하의 작가인 세키네 노부오(関根伸夫·1942~2019)도 자주 합류했다. 곽인식의 개인전이 열리는 날이면 2차는 항상 토랑쿠였다.

곽인식과 이타미 준은 연주활동을 하던 길옥윤을 만나러 코리안 클럽이 몰려 있는 아카사카 미츠케(赤坂見附)를 가끔 찾았다. 길옥윤이 한잔 더 하라고 돈을 쥐여 주면 신나게 2차를 갔다. 마이크를 잡은 이타미 준은 길옥윤 작곡에 이타미 준과 아라키 도요히사가 공동작사하고 나훈아가 일본어로 노래한 ‘서울 동경, 그대여 안녕’을 열창했다.

한국의 대중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60년대 이후 곽인식은 이우환, 하야시 요시후미(林芳史), 곽덕준, 김구림 등 일본의 한국계 작가들과는 물론 국내의 미술계와도 연대를 계속 맺고 있었다. 그러나 곽인식은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직접 한국을 방문하는 게 주저됐다. 1982년 현대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을 계기로 33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았다. 현대화랑 대표 박명자와 일본미술학교 후배인 서양화가 임직순이 그의 신분을 보증하고 편의를 제공했다.

이후로 곽인식의 한국행이 잦아졌다. 서울과 대구의 미술관과 화랑들이 곽인식을 반겼다. 일본 현대미술의 아방가르드로 통했던 그의 행보는 국내의 미술인들에게 큰 자극이 됐다. 곽인식이 다시 이슈가 된 건 2019년에 열린 곽인식 탄생 100주년 전시를 통해서다. 국립현대미술관과 대구미술관에서 전시와 세미나가 열렸다.

포도주 즐기고 커피는 매일 대여섯 잔

곽인식은 밀항 후 다시 한국을 첫 방문한 지 6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만큼 한국에서의 활동이 짧았기에 그의 전모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100주년 전시에 나온 그의 유작들이 보여 준 실험성은 국내의 젊은 미술작가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곽인식은 드물게도 이지적인 미술작가다. 그동안 한국과 일본의 미술계가 이지적인 그를 실시간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의 가치는 지금 재평가되고 있다.

도쿄에서의 곽인식은 한국음식이라면 다 좋아했다. 1985년 대구 수화랑 전시 때는 현장작업을 위해 오랫동안 대구에 머물렀다. 황현욱, 박현기, 이교준, 박두영 등 대구의 젊은 미술인들이 제재소에서 원목을 자르고 옮기는 등 현장작업을 도왔다. 이때 작심하고 고향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알려진 현풍의 할매곰탕집을 찾아갔다. 도쿄에서 먹던 한국음식과는 다른 경지의 진득한 맛이 우러났다. 오랫동안 잊었던 뜨끈뜨끈한 온돌방의 기운 같은 게 목젖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곽인식은 50대 중반에 결핵을 심하게 앓았다. 그 이후 사케나 맥주 등을 멀리하고 포도주로 일관했다. 커피는 매일 대여섯 잔을 마셨다. 곽인식은 성격이 깔끔했다. 가슴주머니에는 항상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의 잠옷 가슴주머니에는 예쁜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 더는 밥을 먹고 입을 닦을 수도 없는 무용지물의 손수건이었기에 처연하게 예뻤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