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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빌라모아 성당에서 조우한 날라리 독일인 오빠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47)

도보순례 27일차, 레돈델라(Redondela)에서 폰테베드라(Pontevedra) 20km

‘It never rains but pour’ 속담처럼 행운도 불운도 몰려다닌다. 좋은 일도, 재수 없는 일도 그렇다. 밤사이 베드버그에 잔뜩 물어 뜯겼는데 이른 아침부터 장대비까지 내린다. 집 떠난 지 40일 되는 날, 포르투갈에서는 그렇게 쨍쨍하던 날이 스페인 국경을 넘는 날부터 비 예보를 하더니 결국 장엄한 비다.

악명높은 베드버그에 물렸을 때는 빨리 옷과 소지품 모두를 세탁하고 바스러져버릴 만큼 바짝 건조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렇게 비가 온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레돈델라 보다 폰테베드라가 더 큰 마을이니까 세탁과 건조가 가능한 숙소를 찾기가 쉬울 것이고 위안하며 털고 일어났다.

소토마요르(soutomaior) 스페인 북부의 작은 시골마을. 순례길이 세월이 두껍게 앉은 다리를 지난다. [사진 박재희]

소토마요르(soutomaior) 스페인 북부의 작은 시골마을. 순례길이 세월이 두껍게 앉은 다리를 지난다. [사진 박재희]

베드버그, 침대벌레라고 부르는 이 끔찍한 흡혈 해충의 정체는 벼룩이다. 개미나 모기에게 물린 것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것들이 물어뜯은 흔적은 영락없이 연이어 ‘다닥’ 두 번이거나 혹은 삼각대형으로 ‘다다닥’ 부풀어 오른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가려운 정도란 상상초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살갗에 피가 나도록 긁다가 진저리를 치게 된다. 심지어 상처도 오래간다. 베드버그가 사람 피를 빨고 교환해 둔 독으로 부풀어 오른 자국은 기어코 거무튀튀한 때처럼 자국까지 남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가렵기가 더 심해졌다.

가슴팍에 조그만 언덕이 솟아난 것처럼 우다다다 물어뜯은 자리에 멘솔크림을 잔뜩 덮고 출발하자. 차라리 비를 흠뻑 맞으며 걷는 것이 마음 편할 것도 같았다. 처음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스페인에서 하루도 빼지 않고 비를 맞았고 그래서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린 초록색 판초, 배추벌레 차림을 하고 걷기 시작했다. 온몸이 근질근질 베드버그 공포로 쪼그라들었었는데 코가 뻥 뚫리도록 시원한 숲이 나타났다. ‘산도깨비 방향제 백만 통!’ 피톤치드 숲을 걸으며 부러 큰 소리로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폰테베드라의 성당.

폰테베드라의 성당.

삼파요 다리(Ponte Sampaio).

삼파요 다리(Ponte Sampaio).

유명관광지도 아닌 그냥 시골 마을, 소토마요르(soutomaior)에 다리를 눈앞에 두고 가슴이 벅찼다. 세월의 더께가 앉은 다리(Ponte Sampaio)를 지나는데 마치 발바닥이 물질이 된 시간을 밟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여기서 점심 먹으라 시네. 괜찮대. 내가 물어보고 허락받았어.”
로사가 빌라모아 성당 안으로 손짓하며 주변을 서성대는 나를 불렀다. 배는 고픈데 비 때문에 앉을 자리를 찾을 수 없어 난감하던 차였다.
“허락이요? 성당에서 음식 먹어도 된대요?”
“응. 내가 마리아님한테 물어봤더니 괜찮다고 하시더라고.”

세비야 근처에 산다는 아줌마 로사는 뭐든 성모마리아에게 묻고 허락을 받아내는데 특기가 있다. 주로 난감한,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 이슈를 마리아께 묻는다. 패키지로 허락을 받았는지 로사는 성당을 지나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호주 커플, 이탈리아 부부, 벨기에 아저씨까지 들어오자 조그만 성당이 꽉 찼다. 나란히 앉아 성모마리아를 마주 보며 챙겨온 점심을 먹었다.

피톤치드로 가득한 숲. 차량용 공기청정기 향이 넘실거린다.

피톤치드로 가득한 숲. 차량용 공기청정기 향이 넘실거린다.

8명이면 가득차는 작은 기도소 성당이 열려있어 비오는 날 쉼터역할을 한다.

8명이면 가득차는 작은 기도소 성당이 열려있어 비오는 날 쉼터역할을 한다.

성당 안에서 우리는 로사를 따라 무엇이든 성모상을 향해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 첨벙거리는 비를 털어 짜고,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 바나나를 먹고 “죄송합니다”하고 냄새나는 신발과 양말을 벗어 발을 쉬었다.

왜 웃음이 터지는지 모르겠지만 “죄송합니다” 말한 후에 자꾸 웃었다. 모기소리로 “죄송합니다”라고 말한 피터가 죄지은 얼굴로 발가락 물집 치료를 시작했을 때는 단체로 웃는 간질에 걸린 것처럼 배꼽을 잡았다. 배가 아프도록, 꺼이꺼이 목구멍으로 웃음을 집어삼켰다.

기도하려고 들어갔던 성당에서 우리는 먹고 냄새나는 양말을 벗으며 더 큰 은혜를 느꼈던 것 같다. 거대한 은혜를 받고 나오는 길에 일주일 전에 만났던 베를린 예술가 마이클과 마주쳤다. 수심이 가득하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싶게 그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하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날라리 오빠, 동네 노는 형 분위기는 사라진 채였다.

“독일 친구들은 다 어디 가고 너 혼자야?”
“혼자 걷고 싶어서. 마음이 복잡한 일도 있고 서로 보조를 맞추는 것도 부담스러워서.”

그는 동독 출신 예술가다. 알고 보니 유명한, 그것도 매우 성공한 화가이자 사진 예술가. 독일 사람이라면 알만한 사람이니 그의 실제 이름 대신 여기서는 마이클이라고 부르겠다.

“첫 번째 아내였던 전 처 아들이 자살했어. 우울증이 심했거든.”
마이클은 세 번 결혼했다. 첫 번째는 연상의 이혼녀, 두 번째는 동갑내기 미혼모였다고 한다. 첫 번째 두번째 부인의 아이들을 함께 키웠고 본인 소생은 없다. 서른 살 차이가 나는 지금 부인, 세 번째 아내만이 자신과 첫 결혼인데 둘 사이에도 아이는 없다. 첫째 부인과 가장 오래 살았고 지금도 가장 친한 친구라고 했다. 그녀의 아들은 자기와 절친에 다름없는데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니. 그런 표정일 만 하다.

과일,음료와 간단한 간식을 파는 숲속의 순례자 매점을 지키는 직원의 옷차림이 재밌다.

과일,음료와 간단한 간식을 파는 숲속의 순례자 매점을 지키는 직원의 옷차림이 재밌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답을 모르는 척 자신을 속이고 찾아 헤맨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답을 모르는 척 자신을 속이고 찾아 헤맨다.

“나흘 후면 산티아고에 도착이잖아. 그런데 당장 베를린으로 가서 장례를 치르는 것을 돕고 싶어. 지금 그녀를 위로할 사람이 나밖에 없어.”
“순례는 나중에 다시 하면 되지. 마음이 그렇다면 베를린으로 돌아가.”
“그런데 문제가 있어. 와이프가 산티아고로 와서 함께 가기로 했거든. 게다가 와이프는 전처와 연락하는 걸 너무 싫어하는데… 그걸 알아서인지 전처도 장례에 오지 말고 아들을 위해 산티아고를 끝까지 걸어 달라고 하더라고… 너무 슬퍼. 전화통화 하면서 같이 울었어.”

자기 마음을 모르겠다고, 무언가 자꾸만 말을 건네고 있는 느낌인데 마이클은 모르겠다고 했다. 그 마음이 왜 나에게는 명백한 것일까? 마이클은 지금 부인을 무척 사랑한다지만 대화는 전혀 안 된다고 했다. 대화가 되지 않는데 어떻게 사랑에 빠질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는 나로서는 대화가 되지 않아도 사랑하는 마음, 그 높은 경지를 존중해주기로 했다.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마이클이 물었다.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
“나는 네가 아니잖아.”
“…”
생각이 많아 걸음이 늦어지는 마이클과 나는 보조가 맞았다. 대화를 더 할 수도 없을 만큼 빗줄기가 굵었다. 눈뜨기도 힘들게 쏟아지던 비가 갑자기 거짓말처럼 멈추고 순식간에 하늘이 갰다.
“아내에게 전화해서 오지 말라고 해야겠어. 베를린으로도 가지 않을래. 아무래도 나 혼자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산티아고에서 피스테라나 무시아까지 걸어볼까 봐.”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답을 모르는 척 자신을 속이고 찾아 헤맨다. 하늘이 개면서 한 겹을 벗은 마이클과 폰테베드라에서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기업인·여행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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