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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의 추락…26년전 그를 스타로 만든 여판사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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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장세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은경 전 한국여성변호사회장이 22일 서울시청 건물 앞에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시장실에서 한 여성이 성추행을 당해 울고 있었는데 우리는 몰랐다. 지금은 2차 피해로 더 많이 울고 있다. 성범죄 묵인·방조와 고소 기밀 유출 등의 책임을 반드시 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이은경 전 한국여성변호사회장이 22일 서울시청 건물 앞에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시장실에서 한 여성이 성추행을 당해 울고 있었는데 우리는 몰랐다. 지금은 2차 피해로 더 많이 울고 있다. 성범죄 묵인·방조와 고소 기밀 유출 등의 책임을 반드시 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여성 인권 대변자'로 각인된 계기는 1990년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이었다. 92년 5월 서울대 화학과 실험실에 취업한 우 조교는 신 교수가 기기 교육을 이유로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계속한다며 불쾌감과 거부 의사를 표시했다. 이듬해 6월 재임용에서 탈락한 우 조교가 대자보를 붙여 억울함을 공개 호소하자 신 교수는 우 조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서울대생과 여성단체가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려 그해 10월 신 교수와 서울대 총장,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5000만 원의 민사 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원까지 가는 우여곡절 끝에 99년 6월 신 교수에게 500만원 배상 판결이 나왔다.
 변호사 박원순은 성희롱(Sexual harassment)이란 용어조차 생소하던 당시 직장 내 성희롱에 관한 국내 최초의 소송을 맡은 6인 변호인단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여성권익 신장 공로를 인정받아 98년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받으며 스타가 됐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20여년 뒤 여비서를 성추행한 혐의로 고소당하자 불과 이틀 만에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시민운동가이자 '여성 인권 대변자'에서 '최초의 성추행 혐의자 서울시장'으로 추락했다.
 제9대 한국여성변호사회장을 역임한 이은경(56) 법무법인 산지 대표변호사는 94년 5월 신 교수에게 3000만원의 배상 책임을 판결한 1심 재판부(서울민사지법)의 유일한 여성 판사였다.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을 지낸 그를 지난 22일 만나 당시 성희롱 판결과 박 전 시장 성추행 사건을 주제로 인터뷰했다.

1998년 2월 당시 박원순 변호사(왼쪽)가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 소송에서 승소한 뒤 축하 모임에 참석한 모습. 국내 최초 성희롱 배상 판결을 받아낸 그는 '여성 인권 대변자'로 평가받았다. [중앙포토]

1998년 2월 당시 박원순 변호사(왼쪽)가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 소송에서 승소한 뒤 축하 모임에 참석한 모습. 국내 최초 성희롱 배상 판결을 받아낸 그는 '여성 인권 대변자'로 평가받았다. [중앙포토]

 -최초의 성희롱 배상 판결에 참여했다.
 "91년 판사로 임용돼 서울남부지원에 부임한 당시는 법원 건물에 여자 화장실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성희롱 개념을 처음 알리고 판례를 만드는 재판이어서 엄청 힘들었다. 박장우 부장판사(법무법인 미래 대표변호사), 강승준 주심 판사(서울고법 부장판사)를 포함한 우리 재판부는 고심을 많이 했다. 3000만원 배상 판결 이후 '법원을 폭파하겠다'는 항의 전화까지 빗발쳤다. 그 판결을 계기로 성희롱 방지 조치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기 시작했다. 당시 판결이 한국 사회의 흐름을 선도해 바꾸는 데 기여했다고 본다."
 -당시 3000만원 판결이 널리 회자했다.
 "액수가 많아 보여도 여성에 대한 성희롱과 음담패설이 만연한 한국사회에 그 판결이 경종을 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 이후 적대적 성차별은 많이 줄었고 성범죄 형량도 엄청 높아졌다. 반면 온정적 성차별은 여전하다. 전통적 여성 역할을 잘하는 여성에게 보상해주는 식의 차별은 계속되고 있다."
 -최초의 성희롱 소송을 이끈 변호사가 성추행으로 피소됐다.
 "충격적이다. 당시 재판 과정에서 박원순 변호사의 기여가 컸다. 법정에서 차분한 논리로 변론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2016년 여성변호사회장에 취임한 뒤 박 시장을 방문한 적 있다. 성희롱 판결을 언급했더니 '미국에서 성희롱 개념을 처음 접하고 이를 한국에 도입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그 사건을 맡게 됐다'고 기억하더라."
 -그는 '페미니스트 시장'을 자처했다.
 "서울시 정책의 디테일을 10년간 챙겼고, 지지세력으로 이뤄진 이익공동체를 먹여 살리는 가부장 같았다고 한다. 드러난 그의 행동을 보면 적대적 성차별도 보이지만, 온정적 성차별에 가까워 보인다. 남성이 여성을 사랑하고 부양자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있다는 지배 논리를 은연중에 강화하는 것이다. 낮잠을 여비서가 깨워야 박 시장이 화를 안 냈다니 바로 이런 게 은근한 온정적 성차별이다."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 측의 지난 22일 2차 기자회견 장면.      김상선 기자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 측의 지난 22일 2차 기자회견 장면. 김상선 기자

 -박 시장은 떠났지만, 피해자는 지금도 고통받고 있다.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심각하고, 변호인에 대한 신상털기와 공격이 폭력에 가깝다. 유서에 '모두 안녕'이라고 쓰면 끝인가. 피해자에게 사과라도 한마디 해야 했다. 피해자가 서울지방경찰청에 가서 성폭력 피해 사실을 진술하던 바로 그 시간(8일 밤)에 서울시장 공관에서 측근들과 대책회의를 했다니 지극히 비정상적이다. 고소 내용을 미리 입수해 말맞추기를 했다면 반칙이고 특권이다."
 -'공소권 없음'으로 끝낼 사안인가.
 "피고소인이 사망해 통상적으로 그런 처분이 나올 거다. 그러나 고소 내용 기밀 유출, 서울시의 묵인과 방조, 2차 가해 등 여러 혐의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이니 사실 규명은 불가피하다. 서울시청에서 일어난 일인 만큼 국가 배상 책임도 문제 된다. 공소권 없음에 빗대어 사건을 간단히 처리하면 절대 안 된다. 이 정부 들어 공소시효가 완성된 사건도 대통령 지시로 다시 수사했다. '공소권 없음' 사건이라도 진실을 규명할 의지와 용기가 있느냐가 중요하다."
 -판사 출신인데 고소장대로라면 어떤 처벌이 가능한가.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은 성폭력 특례법 10조 위반으로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린다. 텔레그램 등 통신 매체를 이용한 음란 행위는 성폭력 특례법 13조 위반으로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 감이다. 몸을 만지는 등 강제 추행은 형법 298조 위반으로 법정 형량은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벌금 1500만원 이하다."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집무실 입구 모습. 박 시장이 도입한 따릉이 자전거가 놓여 있다. 최은경 기자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집무실 입구 모습. 박 시장이 도입한 따릉이 자전거가 놓여 있다. 최은경 기자

 -일부 지지자들은 "자살로 책임을 충분히 졌다"고 강변한다.
 "누구나 삶에 공과가 있다. 다만 죽음으로 과오를 덮으려 하고, 극단적 선택을 동정하거나 미화해서는 안 된다. 부검 없이 바로 장례를 치렀지만, 자살에 대한 ‘심리 부검’을 반드시 하면 좋겠다.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다. '자살 예방법'에 따르면 자치단체장에게 자살 예방책임이 있다. 진상을 철저하게 규명해 누구든지 죽음으로 과오를 덮을 수 없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문제가 생기면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는 나쁜 선례를 없애야 한다."
 -일각에서 "왜 4년이나 지나서 문제를 제기하느냐"며 피해자다움을 지적한다.
 "피해자다움(Victimhood)을 강요하면 안 된다. 성(性)인지 관점이 없어서 그렇다. 성인지 감수성이란 용어보다는 성인지 관점이 더 적절한 용어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2심 재판에서 피해자다움을 부정하고 피해자의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을 인정했다. 그런데 진혜원 검사는 피해자를 조롱했다. 미투(Me too) 운동으로 쌓아온 공든 탑을 무너뜨리고 여성계의 노력을 깎아내린 행동이다."
 -정치적 진영 논리에 따라 반응이 엇갈렸다.
 "편 가르기 때문에 ‘옳고 그름’이 달리 평가되는 건 법치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진영과 정치 논리가 개입할 사건이 전혀 아니다. 여야 불문하고 권력형 성범죄에 대한 피해자 지원과 재발 방지에 한목소리를 내야 할 사건이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라는 핵심 쟁점이 여야 대결과 정치 논리에 매몰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무엇보다 시간이 흐르면서 진실을 밝히고 오류를 바로잡을 기회가 흐지부지될까 우려스럽다."
 -서울시·경찰·여성가족부·민주당·청와대의 대응을 어떻게 보나.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은 피해자를 당사자는 물론이고 배우자, 직계 친족, 형제자매까지 아주 넓게 규정한다. 이 사건 피해자를 여당 측은 '피해 호소인'이라 불렀다. ‘피해자와 가해자 구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였다. 박 시장을 가해자로 보이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 미온적 태도를 넘어 고소 내용 관련 정보를 제공해 시간을 벌게 해줬다는 의혹까지 받고 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10일 박원순 전 서울시장 빈소에서 질문한 기자에게 심한 욕설을 내뱉어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은 성추행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이라고 불러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중앙포토]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10일 박원순 전 서울시장 빈소에서 질문한 기자에게 심한 욕설을 내뱉어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은 성추행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이라고 불러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중앙포토]

 -정부는 역할을 제대로 했나.
 "국가와 지자체는 피해자를 보호하고 지원할 의무와 2차 피해를 방지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국가와 지자체가 2차 피해를 방관할 뿐 아니라 정치권은 한술 더 떠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에 동조하는 듯하다. 가족장이 아니라 5일간 서울특별시장(葬)을 강행한 것부터 2차 가해로 볼 수 있다. 지금이라도 여가부는 인터넷 댓글과 유튜브에서 벌어지는 2차 피해를 막고 피해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 가만히 있으면 직무유기다. 이정옥 여가부 장관이 공개적으로 한마디 해야 한다. 여성 비하 논란을 일으킨 탁현민을 중용한 청와대 인사를 여성계는 나쁜 사례로 본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이라며 여성인권 존중을 말로만 할 게 아니라 지금 행동으로 진정성과 의지를 증명해야 한다."
 -성희롱 판결 이후 20년이 흘렀는데 성범죄가 끊이지 않는다.
 "적어도 이번 사건에서는 법과 제도의 미비보다는 법률에 대한 존중과 준수가 더 문제다. 성희롱은 차별적 조직문화의 또 다른 이름이다. 여성의 성희롱 경험비율은 최고경영자(CEO)의 성 평등 인식과 여성 관리자 비율에 반비례한다는 연구가 있다. 인사권과 의사결정이 합리적 절차와 공식 시스템을 통해 움직이고 연공서열보다 개인의 성과를 중시할수록 성희롱 경험률은 낮아진다. 침묵하고 회피하는 집단주의 조직문화가 가장 큰 문제다. 양성평등을 촉진하고 성범죄 방지를 위해서는 조직문화를 바꿔야 한다. 조직문화가 현저히 개선되지 않으면 성범죄는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다."

이은경 변호사는 22일 서울시청 본관 앞에서 진행한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침묵하고 회피하는 집단주의 조직문화를 바꾸지 않으면 한국사회에서 성범죄는 앞으로도 계속 터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장진영 기자

이은경 변호사는 22일 서울시청 본관 앞에서 진행한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침묵하고 회피하는 집단주의 조직문화를 바꾸지 않으면 한국사회에서 성범죄는 앞으로도 계속 터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장진영 기자

 ◇이은경=1964년 제주 태생. 고려대 법대 및 동 대학 법무대학원 석사. 사시 30회로 판사에 임용된 뒤 서울중앙지법 판사를 역임했다. 서울지방변호사회 법제위원장, 경찰청 인권위원, 국가인권위원회 비상임위원, 대한변호사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2016년부터 2년간 한국여성변호사회장으로 활동했다.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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