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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얼얼, 땀 뚝뚝…그래도 끌린다 화끈 후끈 대구 빨간 맛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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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힘내라 대구경북 ⑤ 대구 맛투어

매운맛은 통증이라고 한다. 그래도 우리는 매운맛을 찾는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날이 더울수록 매운맛에 더 기댄다. 일상이 고될수록 우리는, 입안 얼얼해지고 땀 뚝뚝 듣는 빨간 맛에 의지한다. 대구의 맛을 맵고 짠 빨간 맛이라 정의할 수 있다면, 대구에서의 삶이 그만큼 퍽퍽하다는 뜻일 수 있겠다.

고기 부산물로 밥상 차리는 대구 #막창·곱창·닭똥집 요리 발달해 #서문시장 칼국수 후루룩 마시고 #찜갈비는 젓가락 당기는 뻘건맛

대구 여행 두 번째 이야기는 대구 맛 여행이다. 대구에 뭐 먹을 게 있느냐 비웃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안다. 솔직히 얼마 전까지도 내가 그 축에 속했다. 지금은 아니다. 대구 음식에 밴 우리네 이야기를 알기 때문이다. 이젠 납작만두가 얇다고 깔보지 않을 것이다.

맛 골목

대구 안지랑 곱창골목 ‘성주곱창막창’의 곱창과 막창 요리. 장진영 기자

대구 안지랑 곱창골목 ‘성주곱창막창’의 곱창과 막창 요리. 장진영 기자

대구는 막창이다. 이 짧은 문장에 대구 음식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부산 꼼장어’처럼 ‘대구 막창’은 지명과 음식이 합쳐 사회적 의미를 획득하는 몇 안 되는 사례다. 대구 막창에는 소·돼지·닭의 부산물 조리법이 유난히 발달한 대구 특유의 문화사가 배어 있다. 아울러 이 역사에는 부산물도 선뜻 버릴 수 없었던 대구 서민의 서글픈 한 끼가 포개져 있다.

안지랑 곱창 골목에 54개 곱창구이집이 모여 있다. 막창과 곱창을 상가번영회가 공동 구매하고, 식당마다 조리법을 달리해 내놓는다. 대구 막창은 소 막창에서 시작했으나, 곱창 골목은 돼지 막창을 주로 쓴다. “옆 동네에 ‘신천지(대규모 확진자가 나왔던 신천지 예배당)’가 있었는데 우리 골목에선 확진자가 한 명도 없었다”고 유태근(61) 상가번영회장이 여러 번 강조했다.

평화시장 닭똥집 골목 ‘평화통닭’의 닭똥집 튀김. 장진영 기자

평화시장 닭똥집 골목 ‘평화통닭’의 닭똥집 튀김. 장진영 기자

평화시장에는 닭똥집 골목이 있다. 24개 식당이 닭똥집을 튀긴다. 1970년대 주변 공사장 인부에게 내놓았던 값싼 메뉴가 별미로 진화했다. 쫄깃쫄깃한 식감이 두고두고 생각난다.

복불고기 vs 찜갈비

동인동 찜갈비 골목 ‘봉산찜갈비’의 찜갈비. 장진영 기자

동인동 찜갈비 골목 ‘봉산찜갈비’의 찜갈비. 장진영 기자

대구 별미에도 고급 메뉴가 있다. 우선 찜갈비. 여느 갈비찜과 달리 찜갈비에는 무·당근 같은 채소가 안 들어간다. 양은그릇에 소갈비만 들어가 있다. 대구 맛을 ‘맵고 얼얼한 시뻘건 맛’이라 정의할 때 맨 먼저 꼽히는 음식이다.

대구시청 근처 동인동에 저마다 ‘원조’를 주장하는 찜갈비 집 여남은 곳이 모여 있다. 1972년 문 연 ‘봉산찜갈비’의 이순남(78) 창업주가 “매운맛의 비결은 마늘”이라고 일러줬다. 작정하고 세어 봤더니 찜갈비 1인분에 마늘 18쪽이 들어가더란다. 땀이 뚝뚝 떨어지는 데도 자꾸 젓가락이 간다.

‘미성복어불고기’의 복불고기. 장진영 기자

‘미성복어불고기’의 복불고기. 장진영 기자

대구는 복어도 맵게 먹는다. 들안들의 ‘미성복어불고기’가 전국 원조로 알려져 있다.  1978년 창업주 최정옥(66)씨가 매운 양념 잔뜩 넣고 복어를 처음 볶았다. 코로나 사태 이전 이 집에서 한 달에 보통 까치복 2.1t을 소비했다고 한다. 복어랑 같이 볶는 콩나물을 주방 안쪽에서 직접 키운다.

따로국밥

‘국일따로국밥’의 따로국밥. 장진영 기자

‘국일따로국밥’의 따로국밥. 장진영 기자

대구는 육개장의 고장이다. 최남선이  『조선상식문답』(1946)에서 내린 정의다. 말하자면 육개장은 칼칼한 소고깃국이다. 무·대파 넣고 푹 곤 사골 육수에 마늘과 고춧가루로 매운맛을 더한 음식이다. 서울에선 육개장에 고사리와 계란을 넣지만, 대구에선 선지를 넣는다. 대구 육개장은 매운 소고기뭇국과 선짓국이 결합한 고깃국을 이른다.

따로국밥도 있다. 국밥은 국에 밥을 만 음식인데, 따로국밥은 국과 밥이 따로 나온다. 그럼 국밥이 아니라 육개장(또는 선짓국)인데, 굳이 따로국밥이라고 한다. 따로국밥 원조로 통하는 진골목 끝자락의 ‘국일따로국밥’에 내력이 전해온다. 대구에 피란민이 몰렸던 1950년대, 서동순·김이순 부부가 장터에서 국밥을 팔고 있었다. 한데 갓 쓴 어르신들이 “밥 따로!”를 외쳤다. 전쟁통이어도 양반이 밥을 국에 말아서 먹을 순 없다고 했단다. 따로국밥은 양반 체면이 만들어낸 신메뉴였다. 1946년 개업한 국일따로국밥은 3대째 내려오고 있다.

국수를 마시다

대구 서문시장의 칼국수 골목은 대구를 상징하는 장소다. 대구에서 가장 북적였던 이 골목이 지난봄 텅 비었었다. 이젠 예전의 활력을 거의 회복했다. 대구에서 칼국수는 단순한 음식을 넘어선다. 아스라한 추억이자 삶의 애환이다. 장진영 기자

대구 서문시장의 칼국수 골목은 대구를 상징하는 장소다. 대구에서 가장 북적였던 이 골목이 지난봄 텅 비었었다. 이젠 예전의 활력을 거의 회복했다. 대구에서 칼국수는 단순한 음식을 넘어선다. 아스라한 추억이자 삶의 애환이다. 장진영 기자

지난봄 대구의 참상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진이 있었다. 손님 한 명 없는 서문시장 칼국수 골목이었다. 너무 휑해 안타깝고, 너무 적막해 섬뜩한 장면이었다. 하필이면 서문시장이었고, 하필이면 칼국수여서 충격은 더 컸다.

서문시장 ‘미성당’의 납작만두. 장진영 기자

서문시장 ‘미성당’의 납작만두. 장진영 기자

대구의 국수 사랑은 각별하다. 1980년대 전국 국수 생산량의 60% 이상을 대구가 담당했다고 한다. 대구에서 시작한 삼성의 1930년대 주력 생산품도 ‘별표 국수’였다. 1950년대 이후 밀가루가 미국 구호물자로 들어오면서 대구는 국수의 도시가 되었다. 납작만두·야끼우동 같은 대구 특유의 밀가루 음식도 그맘때 탄생했다.

대구에는 누른국수가 있다. 콩가루 섞은 밀가루 반죽을 밀대로 눌러 면을 뽑은 뒤 멸치육수에 끓인 칼국수를 이른다. 서문시장 옆 골목 ‘합천할매칼국수’에서 1대 방점이(89) 여사의 비법 그대로 2대 강병태(71)씨가 면을 뽑아 3대(33)가 끓여낸 누른국수를 후루룩 마셨다. 둘러보니 다들 그렇게 마시고 있었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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