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성추행 징후 눈감은 서울시, 이젠 눈 뜨고 책임져야

중앙일보

입력 2020.07.24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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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편광현 사회2팀 기자

편광현 사회2팀 기자

예고 없는 사고는 없다. 통계학에서 ‘하인리히 법칙’은 대형사고가 일어나기 전 수많은 사전 징후가 있다고 분석한다. 재해가 발생해 중상자 한 명이 나왔다면 그 전에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경상자가 29명, 다칠 뻔한 잠재적 부상자가 300명이 더 있다는 것이다.

동료 20여 명에 알렸지만 묵살
‘술 취한 척 뽀뽀’등 피해제보 속출
잘못 사과하고 성실히 조사 받아야

하인리히 법칙은 권력의 사고에도 적용된다. 현직 서울시장이 성추행 혐의로 고소를 당한 ‘대형 사고’가 그렇다. 고소인인 전직 비서 A씨를 돕는 여성단체들은 기자회견과 보도자료를 통해 ‘박 전 시장 성추행 고소’가 있기 전, 서울시 내부에 수많은 사전 징후가 있었음을 지속적으로 지적해왔다. 지난 22일 2차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재련 온세상법무법인 변호사는 “비서실에서 근무한 A씨는 4년간 인사담당자를 포함한 서울시 직원 20여 명에게 성추행 피해 사실을 알렸지만 묵살 당했다”고 말했다.

서울시가 진상규명 대책으로 내놓은 ‘민관합동조사단’ 구성 방안은 처음부터 번지수가 틀렸다. 수많은 사전 징후를 놓친 서울시에 조사권을 준다는 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여성단체들이 그동안 제보받은 서울시 내부의 성추행 피해 사례를 공개하며 반발한 것은 당연지사다. 이 과정에서 ‘술 취한 척 뽀뽀하기’ ‘바닥 짚는 척하며 다리 만지기’ 노래방에서 ‘허리 감기’ 등의 행태가 서울시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났음이 드러났다. “서울시는 조사 주체가 아닌 책임 주체”라는 여성단체의 주장에 힘이 실렸다.

여전히 일부에선 “여성단체 측이 증거도 없이 감정적인 기자회견을 한다”고 비판한다. 한 서울시 산하 기관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시장님은 사과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시장님을 파렴치한으로 몰고 가기 위해 영결식 날 기자회견을 했다”고 날을 세웠다. 하지만 피해자에 사과 한마디 없이, 또 삶을 정리할 시간조차 갖지 않고 죽음으로 향한 건 가해자다. 피해자 A씨야말로 온갖 억측에 맞서며 현실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개인 입장임을 전제로 하긴 했지만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이 23일 박 전 시장의 성추행 피해자에게 위로의 뜻을 밝힌 것은 늦었지만 다행한 일이다. 강 대변인은 전날 피해자가 밝힌 입장문 중 ‘본질이 아닌 문제에 대해 논점을 흐리지 않고 밝혀진 진실에 함께 집중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는 대목을 언급한뒤 “그 내용에 공감한다. 더해서 피해자에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또 “진상규명 작업 결과 사실관계가 특정되면 뚜렷하고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해당 의혹이 제기된지 2주가 지나도록 “별도로 드릴 말씀은 없다”(13일), “차분히 조사 결과를 지켜볼 때”(15일)라는 반응만 냈을 뿐 청와대는 공식 입장을 내지 않았었다.

“서울시 관련자들은 수사와 조사에 성실히 임해야 합니다.” 1만자에 달하는 긴 기자회견문에 담긴 A씨 측 요구는 명료했다. 서울시는 ‘6층 비서실’ 등에서 벌어진 지난 잘못을 사과하고 성실하게 조사에 임해야 한다. 사전 징후를 놓쳤다면 사후 책임이라도 제대로 져야 한다. 그래야 땅에 떨어진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편광현 사회2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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