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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 정수시설만 갖추면 뭐하나” 수돗물 유충 사태 진짜 문제

중앙일보

입력

“1991년 낙동강 페놀 유출 사고를 계기로 국비 수천억 원을 들여 고도 정수처리 시설을 지었다. 그러나 현장 운용이 제대로 되지 못하면 결국 무용지물이라는 게 드러났다. 수돗물 유충 사태는 전형적인 관재(官災)다”

최근 불거진 수돗물 유충 사태와 관련해 환경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한 얘기다. 현장에서 정수시설을 관리·통제할 전문인력 부족이 문제를 악화시켰다는 게 골자다. 지난해 5월 인천을 비롯한 수도권에서 녹이 스며든 ‘붉은 수돗물 사건’이 발생한 지 1년 만에 이번 수돗물 유충 사태가 벌어지면서 지자체와 환경 당국의 수돗물 관리 역량이 도마 위에 올랐다.

전국 7개 정수장서 유충 발견 

20일 오전 인천시 부평구 부평정수장 내 한 시설의 모습. 연합뉴스.

20일 오전 인천시 부평구 부평정수장 내 한 시설의 모습. 연합뉴스.

환경부가 지난 15~17일 전국 정수장 49개소를 긴급 점검한 결과, 인천 공촌 정수장을 포함한 전국 7개 정수장에서 유충이 발견됐다. 환경부가 조사 대상으로 삼은 정수장은 지난 14일 깔따구 유충이 발견된 공촌 정수장처럼 ‘활성탄 여과지’가 설치된 곳이다.

활성탄 여과지는 숯과 유사한 고농도 탄소입자로 수돗물 원수 내 유기물을 잡아내 악취나 이물질을 제거하는 시설로 고도 정수처리 시설에만 있다. 이번에 활성탄지에서 유충이 발견된 정수장은 인천 공촌을 비롯해 인천 부평, 경기 화성, 김혜 삼계, 양산 범어, 울산 회야, 의령 화정 정수장 등이다.

"수도전문가 아닌 행정전문가가 수질관리"

연합뉴스.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이번 수돗물 유충 사태에 대해 한목소리로 전문성 결여에 따른 '관재'라고 지적했다. 박석순 이화여대 환경공학과 교수는 21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일반적인 공직자 인사시스템에 따라 ‘순환보직’을 경직적으로 적용하다 보니 물 전문가가 아닌 행정 전문가가 수도 시스템을 통제하게 됐다”며 “현재 각 시의 상수도사업본부장 중 수질·환경 전문가가 몇 명이나 되겠느냐”고 말했다.

수돗물 유충이 발견된 인천시의 상수도사업본부도 일부 직군을 제외하고는 순환보직을 동일하게 적용받는다. 다만 현장에서 전문 분야별 필요 인력이 있을 경우 인천시가 별도 인력을 인사 발령내는 구조는 갖춰져 있다.

보다 근본적인 시스템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조원철 연세대 토목환경공학과 명예교수는 “과거에 없었던 깔따구 유충이 수돗물에서 발견된 건 기후변화와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며 “수돗물 관리의 경우 이처럼 약품처리·기계·기후 등 여러 전공 분야가 종합된 전문 분야인데 현장에서 이 같은 전문인력이 턱 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현장 인력의 경우 4교대가 일반적이지만 시설에 따라 2교대를 하는 곳까지 있어 시설을 일일이 점검하기 힘들다는 맹점도 있다”고 덧붙였다.

'붉은 수돗물 사태' 1년만에 수질관리 논란 

지난해 6월 19일 인천지역 시민단체는 붉은 수돗물 사태 책임을 물어 김모 전 인천시 상수도사업본부장 등을 검찰에 고발했다. 사진은 당시 붉은 수돗물 사태 규명 등을 촉구하는 시민 집회. [뉴스1]

지난해 6월 19일 인천지역 시민단체는 붉은 수돗물 사태 책임을 물어 김모 전 인천시 상수도사업본부장 등을 검찰에 고발했다. 사진은 당시 붉은 수돗물 사태 규명 등을 촉구하는 시민 집회. [뉴스1]

전문가들이 수도 인력·역량 부족을 지적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5월 붉은 수돗물 사태 때도 비슷했다. 당시 인천시 서구 검암·백석·당하동 각 가정집을 비롯해 서울 영등포구, 경기도 평택·광주시 등에서 붉은 수돗물이 흘러나왔다. 이는 인천시의 취수원인 풍납 취수장 전기공사에 따라 취수원이 급작스레 변경되는 과정에서 대응 역량 부족으로 발생한 일이었다. 수도관 2곳에서 물길이 역류, 수압이 상승하며 관 내부 벽의 녹이 떨어져 나가면서 붉은 수돗물이 유입됐다.

조명래 환경부 장관은 “인천시 담당 공무원들이 매너리즘에 빠진 건지 문제의식 없이 '수계 전환'을 했다"며 "그에 따라 발생할 여러 문제점이 충분히 예상 가능했는데 문제가 벌어졌다. 거의 100% 인재"라고 인정했다. 인천시는 사태의 책임을 물어 당시 상수도사업본부장과 공촌 정수사업소장을 직위해제했지만 결국 1년 만에 수돗물 오염 사건이 재발하게 됐다. 정부는 2018년 11월 수도관리 전문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수도관망교육센터'를 개관했지만, 이듬해와 올해까지 연이어 사고가 터진 셈이다.

최승일 고려대 환경시스템공학과 명예교수는 “현장에 전문가가 몇 명만 있다고 해서 개선될 문제는 아니다”며 “근본적 문제는 비전문가를 현장에 배치하는 인사시스템의 결함”이라고 꼬집었다. 시민단체인 수돗물시민네트워크는 “1994년 이후 정부가 약 7000억원을 투입해 표준정수처리시설에 오존처리와 활성탄 여과지를 추가로 설치했지만 26년간 제대로 된 매뉴얼 준수와 관리·감독이 부실했던 게 문제”라고 비판했다. 21일 환경부에 따르면 점검 대상이 된 12개 정수장은 시설에 방충망을 설치하지 않는 등 기본적인 운영 문제까지 지적됐다.

신진수 환경부 물통합정책국장이 21일 정부세종청사 환경부 기자실에서 '전국 수돗물 안전관리에 총력 대응'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1.

신진수 환경부 물통합정책국장이 21일 정부세종청사 환경부 기자실에서 '전국 수돗물 안전관리에 총력 대응'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스1.

"배수지 밀폐화, 수돗물 관리 민영화도 고려해야"

전문가들은 차제에 수돗물 관리 서비스를 민영화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석순 교수는 “정수장에서 나온 물이 배수지를 거쳐 각 가정의 옥내배관과 물탱크로 가게 된다”며 “정부와 지자체가 옥내 시설까지 관리하는 데 한계가 있는 만큼 정수장·배수지 관리는 정부가, 가정 단위의 관리는 민영 회사가 대리하는 게 서비스 질을 향상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조원철 교수는 “배수지가 공기 중에 노출된 경우가 많아 정수를 거친 후에도 얼마든지 대기 중 오염물질과 유충 등에 오염될 수 있는 구조”라며 “배수지 밀폐화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정원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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