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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억원 투입 감염병 온라인 경보체제, 작동하지 않았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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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중국은 왜 코로나19의 초기 대응에 실패했나 

중국에서 코로나19가 통제되기 시작하던 지난 3월 23일 상하이 도심을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 시민들 뒤로 보이는 전광판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사진과 어록이 강조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중국에서 코로나19가 통제되기 시작하던 지난 3월 23일 상하이 도심을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 시민들 뒤로 보이는 전광판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사진과 어록이 강조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중국에서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같은 바이러스는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지만, 또 다른 사스 사건은 없을 것이다. 감염병 감시체제가 잘 작동하기 때문이다.” 2019년 2월 25일 중국 질병예방통제센터(CCDC) 주임인 가오푸(高福) 원사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중국은 2002년 사스 사태 이후 수천억 원을 투입하여 세계 최대 규모의 감염병 온라인 경보체제(warning system)를 구축해 39종의 법정 감염병 정보를 상시 감시해왔다. 일선 의료기관이 감염병을 발견하면 경보체제를 통해 관련 기관에 보고해야 하고, 지역 및 중앙의 질병센터는 이를 실시간으로 확인해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2009년과 2013년에 신종인플루엔자가 전 세계를 휩쓸었을 때도 중국은 성공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보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 결과 ‘제2의 사스 사건’이 발생했다. 왜 그랬을까?

경보체제 불통, 중앙은 소극 대응 #우한시는 상부 위임 없어 무방비 #시민 사회와 언론 자유의 부재로 #당정의 안일한 태도 비판 못 해

중국의 초기 대응에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먼저, 일선 의료기관은 ‘원인 불명 폐렴’의 발병 사실을 알고도 경보체제를 통해 관련 기관에 보고하지 않았다. 우한(武漢)시 정부에 따르면 2019년 12월 8일에 최초의 환자가 발생했는데, 의료기관이 이를 지역 질병센터에 보고한 것은 그로부터 20일이 지난 12월 27일이었다. 또한 정부는 발병 사실을 상부에 제때에 보고하지도, 사회에 제대로 알리지도 않았다.

발병 사실이 상부와 외부에 알려진 것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서였다. 12월 30일에 우한시 중심병원 응급실의 아이펀(艾芬) 주임 의사는 화난(華南)수산시장에서 발생한 ‘원인 불명 폐렴’ 정보를 인터넷을 통해 동료 의사들에게 전달했다. 안과의사 리원량(李文亮)이 이를 다시 SNS을 통해 의과대학 동기생들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정보가 외부에 유출됐다. 이런 상황에서 우한시 정부는 마지못해 12월 31일 중앙에 보고했고, 중국이 이를 세계보건기구(WHO)에 통보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이것이 초기 대응의 첫 번째 실패다.

수천억 들인 경보체제 이윤에 막혀

중국 정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발병을 확인한 이후에도 예방과 통제를 위해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2020년 1월 7일에 이 문제를 논의하고 ‘질병을 잘 통제 및 예방해야 한다는 요구’를 제기했지만, 이를 사회에 공개하지는 않았다. 또한 1월 16일에 개최된 당 정치국 회의에서는 코로나19가 정식 의제로 다뤄지지 않았다. 그 결과 국가 차원의 전면적인 대응 방안도 결정하지 않았다. 이런 소극적인 대응은 1월 20일까지 이어졌다. 최고 권력기관이 안이하게 대응하는 동안 코로나19는 춘절(설)을 맞아 귀성객과 함께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초기 대응의 두 번째 실패다.

우한시 정부도 소극적으로 대응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12월 31일에 중앙에 보고한 이후 상부의 지침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리면서 다시 20일 동안 손을 놓고 있었다. 근거는 법 규정이었다. 즉 지방 정부는 중앙의 위임을 받은 이후에 감염병을 발표하고 정책을 집행할 수 있는데 중앙의 지시가 없었다는 것이다. 우한 시장의 말처럼, 1월 20일에 국무원이 ‘현지 책임’ 방침을 발표하면서 비로소 능동적으로 방역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우한시 의회는 1월 7일부터 10일까지, 후베이성 의회는 1월 13일부터 18일까지 정기회의를 개최했다. 1월 18일에는 우한시가 춘절을 맞아 매년 개최하는 ‘만가연(萬家宴)’이 성대히 열려 4만여 명의 시민이 모여 함께 식사했다. 이런 집단 활동이 코로나19의 확산을 더욱 촉진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처럼 다시 20일의 귀중한 시간이 흘렀다. 이것이 초기 대응의 세 번째 실패다.

중앙 파견 1·2차 조사팀 “통제 가능”

지난 2월 7일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숨진 우한 중신병원의 안과의사 리원량을 추모하는 시민들이 가져다 놓은 조화와 영정. 리원량은 코로나19의 발생을 SNS에 알렸다가 경찰의 제재를 받았다. [AFP=연합뉴스]

지난 2월 7일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숨진 우한 중신병원의 안과의사 리원량을 추모하는 시민들이 가져다 놓은 조화와 영정. 리원량은 코로나19의 발생을 SNS에 알렸다가 경찰의 제재를 받았다. [AFP=연합뉴스]

그렇다면 왜 실패가 반복되었을까? 몇 가지 원인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현행 의료체제에서는 일선 의사와 병원이 새로운 감염병이 출현했을 때 이를 즉시 지역 질병센터에 보고할 동기가 없다. 의료 분야에도 시장제도가 도입된 이후, 의사와 병원 당국자는 자연스럽게 ‘이윤 극대화’를 추구한다. 그런데 새로운 감염병을 보고할 경우, 역학 조사와 병원 폐쇄 등 ‘이윤 극대화’에 불리한 조치가 내려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보고에 주저하는 경향이 있다. 일선 병원이 코로나19가 상당히 퍼진 이후에야 비로소 관계 당국에 보고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중앙이 파견한 역학 조사팀에도 문제가 있었다. 국무원은 12월 31일에 1차, 1월 8일에 2차 조사팀을 우한에 파견했다. 그런데 2차 조사팀도 1차 조사팀처럼 코로나19가 사람 간에 감염되지 않으며, ‘예방 및 통제가 가능하다(可防可控)’는 낙관적인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는 이해할 수 없는 결과다. 1월 중순에는 이미 의료인의 감염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의 감염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1월 19일에 최고 전문가로 구성된 3차 조사팀이 사람 간 감염을 확인하고 이를 중앙에 보고한 이후에야 정면 대응 방침(1월 20일)과 우한 봉쇄 방침(1월 22일)이 내려졌다. 만약 역학 조사팀이 정확한 판단만 내렸어도 코로나19는 더 일찍 통제되었을 것이다.

당정 간부의 고질적인 무사 안일 태도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국민의 생명과 안전보다 정권 안정과 개인 출세를 우선시하고, 이를 위해 지역의 경제 성장과 사회 안정을 추구한다. 이에 불리한 사건이 발생하면 본능적으로 은폐하거나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마지못해 코로나19의 발병을 중앙에 보고한 이후에도 20일 동안 손을 놓고 있었던 우한시 정부의 모습은 이런 태도의 전형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긴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의 자치단체장들이 매일 언론 브리핑을 통해 코로나19의 실상을 알리고, 중앙 정부와 전 국민의 도움을 간절히 요청하는 모습은 우한시 당국자들의 모습과 크게 대조된다.

시민사회와 언론의 자유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적 위기의 대응은 비정부조직(NGO)과 지역 공동체 네트워크가 정부보다 뛰어나다. 이들에게는 관료적 방해물도 없고, 고려해야 할 정치적 요소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은 지역 주민의 필요를 더 잘 이해하기 때문에 제때에 올바른 정책을 제시할 수 있다. 또한 감염병 확산을 막는 데는 언론을 통한 정확한 정보 전달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통해 실상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고, 정부가 사회와 함께 올바른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중국에 없거나 부족한 것이 바로 이 두 가지다. 그 결과 중국 국민에게는 당정간부의 무사 안일한 태도를 비판하고 적극적인 대응을 요구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조차 없었다.

2개월 만의 코로나19 통제 어떻게 가능했나

중국은 3월 19일에 ‘국내 발생 확진 사례 없음’을 기록했다. 우한시도 봉쇄 76일 만인 4월 8일에 봉쇄를 해제했다. 14억 인구를 가진 중국이 어떻게 2개월 만에 코로나19를 안정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을까? 일부 학자들은 이를 ‘권위주의 이점(authoritarian advantage)’으로 설명한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제 국가로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지역을 봉쇄하고 자원을 총동원하며 언론을 통제하여 감염병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너무 단순한 주장이다. 다른 많은 권위주의 국가는 중국처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보다는 중국의 위기 대응 능력이 크게 향상되었고, 통치체제도 자신만의 장점이 발휘될 수 있도록 개선된 결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지난 40여 년 동안 중국은 수많은 위기 상황을 맞았고, 이를 극복하면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왔다. 자연재해로는 2002년의 사스, 2009년과 2013년의 신종인플루엔자 외에도 2008년의 쓰촨(四川) 대지진이 있었다. 경제 위기로는 1997~98년의 아시아 금융위기와 2007~08년 세계 금융위기, 정치 위기로는 1989년의 천안문 민주화 운동과 1991년의 구소련 붕괴가 있었다. 2008년의 티베트 시위와 2009년의 신장(新疆) 위구르 시위 등 크고 작은 수많은 국내 소요 사건도 있었다.

이를 보면 중국은 끊임없이 위기를 겪으면서 대응 능력을 키워왔고, 그에 합당한 통치체제를 수립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코로나19를 안정적으로 통제하는 데도 성공할 수 있었다.

◆조영남

2002년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에 임용되었다. 2016년에는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부작’인 『개혁과 개방』, 『파벌과 투쟁』, 『톈안먼 사건』, 2019년에는 『중국의 엘리트 정치: 마오쩌둥에서 시진핑까지』를 출간했다.

조영남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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