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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방역모범 중대본은 "죄송"…성추행 의혹 서울시는 "모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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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브리퍼로서 죄송함을 마음 속에 가지고 있다. 브리핑을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순간이 오면 반드시 사과해야 할 것들을 항상 다짐하고 있다”(18일 권준욱 중앙방역대책본부 부본부장)

“서정협 권한대행은 비서실장 재직 당시 이번 사안(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과 관련한 어떤 내용도 인지하거나 보고받은 바 없다. 추측성 보도는 진실을 밝히는 데 혼선을 준다. 매우 유감스럽다. 자제해달라”(15일 서울시)

비슷한 시기에 나온 두 공직자의 발언이다. 외신과 해외 기관으로부터 코로나19 방역 모범사례로 거론되는 중대본은 ‘사과’를 얘기했고,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이 불거진 서울시는 ‘유감’을 얘기했다. 지난 4월 비서실 성폭행 사건이 일어난 지 3개월 만에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이 도마 위에 올랐지만 이후 도의적이나마 ‘책임’을 언급한 서울시 관계자는 없었다.

서울시 “피해자에 위로…조사단이 확인할 것”

(서울=뉴스1) 이광호 기자 = 황인식 서울시대변인이 15일 오전 시청 브리핑룸에서 직원 인권침해 진상 규명에 대한 서울시 입장발표를 하기 전 마스크를 벗고 있다. 2020.7.15/뉴스1

(서울=뉴스1) 이광호 기자 = 황인식 서울시대변인이 15일 오전 시청 브리핑룸에서 직원 인권침해 진상 규명에 대한 서울시 입장발표를 하기 전 마스크를 벗고 있다. 2020.7.15/뉴스1

지난 15일 오전 서울시는 ‘직원 인권침해 진상규명에 대한 서울시 입장’ 브리핑을 열고 “여성단체, 인권·법률 전문가 등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민관합동조사단을 구성해 철저한 진상규명에 나서겠다”고 발표했다. 서울시는 “어느 때보다 진실이 중요한 시기”라며 “명확한 사실관계에 기반하지 않은 추측성 보도는 피해 호소 직원에게 2차 피해를 발생시키며 또다른 억측을 불러온다”고 보도 자제를 당부했다.

하지만 끝내 책임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피해를 호소한 직원의 고통과 아픔에 공감하며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는 말을 남겼다. 어느새 서울시는 ‘책임을 져야 할 기관’에서 한발 물러나 ‘위로를 건네는 주체’로 바뀌어있었다. 이후 약 20여분간 이어진 브리핑에서 총 15개의 질문이 황인식 서울시 대변인에게 쏟아졌지만, 그는 대부분의 질문에 “향후 꾸려질 민관합동조사단이 확인할 사안”이라는 대답만을 내놨다. 주요 책임소재는 지금부터 찾아봐야 한다는 의미로 들렸다.

비서실장·젠더특보 “몰랐다” 이구동성

고한석 전 서울시장 비서실장이 15일 오후 서울 성북경찰서에서 박원순 서울시장 사망 관련 참고인 조사를 마친 뒤 청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고한석 전 서울시장 비서실장이 15일 오후 서울 성북경찰서에서 박원순 서울시장 사망 관련 참고인 조사를 마친 뒤 청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도의적 책임은 법적 책임의 대상은 아니더라도 소속 기관 구성원의 행동에 대해 윤리적 책임의식을 갖는다는 뜻이다. 공무원은 무릇 국민에게 공적 임무를 부여받은 '수임자'라는 관점에서 자주 쓰는 말이다. 피해자 측이 성추행이 있었다고 주장한 4년(2015년 7월~2019년 7월)간 총 4명의 비서실장이 거쳐갔지만 이들은 한결같이 해당 사건에 대해 “몰랐다”고 하거나 연락을 피하고 있다. 이들의 재직 기간 동안 피해자는 6개월마다 전보를 요구하고 주변에 피해를 호소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난해 1월 서울시에서 처음으로 임명된 임순영 초대 젠더특별보좌관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박 전 시장이 실종되기 전날인 8일 저녁까지만 해도 (고소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최근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선 “확인되지 않은 오보와 억측이 안타깝고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피해자가 언급한 피해 기간에 임 특보의 임기가 약 6개월 겹치지만, 젠더특보로서 성추행 사건을 막지 못한 데 대한 책임 표명은 없었다.

‘K-방역’ 극찬받은 방역당국, “머리 숙여 죄송”

 권준욱 중앙방역대책부본부장(국립보건연구원장)이 지나나달 5일 오후 충북 청주시 질병관리본부에서 코로나19 국내 발생현황 및 확진환자 중간조사 결과 등 정례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권준욱 중앙방역대책부본부장(국립보건연구원장)이 지나나달 5일 오후 충북 청주시 질병관리본부에서 코로나19 국내 발생현황 및 확진환자 중간조사 결과 등 정례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몰랐다”의 뜻을 풀이하자면 “법적 책임이 없다”가 될 터다. 그러나 이 말이 공직자의 책임까지 가려주는 방패가 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권준욱 중앙방역대책본부 부본부장의 최근 발언에서 찾을 수 있을 듯싶다.

권 부본부장은 지난 18일 정례브리핑에서 코로나19 발생 6개월 간의 소회를 묻는 취재진 질문에 “코로나19와 관련해 잘 알지 못할 때 당시 세계보건기구(WHO)나 각국 지침대로 말씀드렸던 점을 머리 숙여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노약자 등 고위험군을 제외한 일반인에 대해선 마스크 착용을 권고하지 않았던 WHO의 기준을 국내에도 그대로 발표한 데 대한 사과다. 한국의 코로나19 대응에 대해 영국 공영방송 BBC가 “세계가 많이 배워야 한다”고 하는 등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방역 대책을 맡고 있는 그는 책임감이 앞섰던 것 같다.

“몰랐다”는 말이 책임 회피의 도구가 되는 순간 서울시에서 만연해왔던 성추행·성폭력은 언제든 마수를 뻗칠 수 있다. 최춘식 미래통합당 의원이 서울시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7~2020년 서울시와 산하 기관에서 발생한 성비위 사건은 총 42건이다. 올 상반기에만 10차례가 발생했다. 서울시는 그 동안 성희롱·성폭력 및 2차 피해 예방대책(2018),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매뉴얼(2019) 등을 내놓고 대응체계를 홍보해왔다. 하지만 정작 서울시에 없는 건 책임감이지 않을까. 매뉴얼도, 젠더특보라는 직함도 책임의식 없이는 포장일 뿐이다.

허정원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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