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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느림과 성찰의 예술’ 서예를 다시 곁에 두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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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병기 서예가·전북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김병기 서예가·전북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친구를 만나는 것만큼이나 반가운 전시회가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8월 15일까지 열리고 있다.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2000년대까지 활동하다 작고한 한국 근대 서예 명가 23인의 작품을 조명하는 전시다. 새삼 “그래, 우리에겐 서예가 있었지”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8월 15일까지 ‘서예 명가 23인전’ #작품 보며 코로나·무더위 극복을

1980년대만 하더라도 서예는 여느 예술보다 인기 있는 분야였다. 지식인으로 행세하려면 으레 서재에 서예 작품 한두 점은 걸어야 했다. 학생들도 책상 앞에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 등의 멋진 서예 글귀를 붙여놓았다. 그 시절 우리 곁엔 서예가 정겹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산업화·과학화 흐름과 함께 필기도구가 바뀌고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우리는 서예와 멀어졌다. 그런데 지금 서예박물관에 가면 서예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는 반가운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일본인이 가져간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의 명작 ‘세한도(歲寒圖)’를 되찾아온 청년의 기상으로 쓴 소전 손재형의 독창적인 한글 전서(篆書)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광개토태왕비 서체에 담긴 웅혼한 기상과 민족 미감이 창제 당시 훈민정음 글자꼴에 그대로 반영됐다”고 말하며 광개토태왕비 글씨의 혼을 되살린 여초 김응현의 글씨도 볼 수 있다.

한자 문화권 사의화(寫意畵·마음을 그린 그림)는 폴 세잔과 빈센트 반 고흐보다 1000년 앞서 인상주의를 실현한 화풍이다. 그런 전통을 이 시대에 독보적으로 구현한 강암 송성용의 멋진 ‘묵죽(墨竹·먹으로 그린 대나무)’ 앞에 서면 청량한 대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궁체(宮體)는 조선 궁녀들이 한을 삭여 샘물처럼 쓴 청정한 필치다. 궁체의 매력을 되살린 갈물 이철경의 작품 앞에 서면 ‘수덕사 여승’과 ‘해탈의 경지’가 겹쳐지면서 가슴이 울컥해진다. “하나에 집중하면 충(忠)이요, 둘에 집중하려 들면 그게 곧 병(患)이다(一中則忠, 二中則患)”라는 말씀과 함께 아버지가 지어준 일중(一中)이란 호에 담긴 뜻대로 ‘서예 외길’을 간 김충현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중후한 필획으로 웅장한 글씨를 쓰던 검여 유희강이 오른손 마비를 극복하고 왼손으로 쓴 글씨는 인간 승리의 예술이다. 송나라 황정견의 글씨에서 영감을 얻어 독특한 ‘원곡체(原谷體) 한글’을 창작한 김기승의 글씨도 볼 수 있다.

학처럼 고고하면서도 열정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한 월정 정주상, 국내 대학에 서예과를 최초로 설치한 남정 최정균, 일본 서예계를 평정하다시피 했던 석봉 고봉주와 소암 현중화의 작품도 마주할 수 있다.

해서(楷書)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행서(行書)에 추사를 수용하려 노력했던 동정 박세림, 악필의 대가로 알려진 석전 황욱, 예스러운 서체로 한글 서예의 새 길을 연 평보 서희환 등 한 시대를 풍미한 기라성 같은 서예가 23인의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감상하는 호사를 누릴 드문 기회다.

옛사람들은 여름을 나면서 소하기(消夏記·여름 더위를 사그라뜨린 기록)를 남기곤 했다. 각자 소장한 서화 작품을 들고 벗들과 한 곳에 모여 매일 한두 작품씩 돌려보면서 무더위를 식혔다. 그 과정에서 소회를 모은 기록이 소하기다.

코로나19에 발목이 잡혀 있는 지금 선현들이 여름 더위를 사그라뜨리던 지혜를 배워보면 어떨까. 코로나 이전까지 우리의 일상은 “바쁘다 바빠”의 연속이었다. 함께 사는 배려보다는 남을 이겨야 한다는 경쟁심에 과열됐다. 스트레스 해소를 이유로 여행·스포츠·노래방 등 외적 발산형 오락에 탐닉했다.

지금은 느림과 성찰의 예술인 서예를 다시 곁에 둬야 할 때다. 그래, 우리 곁에는 서예가 있었지. 옛 친구 같은 서예를 만나러 함께 가보자.

김병기 서예가·전북대 중어중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