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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의 마지막, 아이러니"···이말 나오게 만든 22년전 재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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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조교 성희롱사건 승소 축하연. [중앙포토]

우조교 성희롱사건 승소 축하연. [중앙포토]

“이른바 성희롱의 위법성 문제는 종전에는 법적 문제로 노출되지 않고 묵인되거나 당사자 간에 해결되었다. 앞으로는 빈번히 문제 될 소지가 많다는 점에서 새로운 유형의 불법행위다”

1998년 대법원은 성희롱을 새로운 유형의 불법행위라고 규정했다. 일명 ‘우조교 사건’의 상고심에서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6년간 변론을 맡은 이 사건은 1심에서 승소했지만 2심에서 패소하며 원점으로 돌아갔다. 3년 만에 나온 대법원 판결은 ‘성적 괴롭힘’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원심을 파기했다.

고 박 전 시장이 싸웠던 2심 판결 보니

박 전 시장이 패소한 2심 판결문(1995년 선고)에는 당시 박 전 시장이 싸워야 했던 성희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서울대 화학과에서 1년 계약 조교로 일한 우모씨는 당시 지도교수인 신모 교수가 기계 사용법 지도를 이유로 불필요한 신체접촉을 수차례 했다고 주장했다. 또 불쾌한 언행이나 둘만의 산책을 제안하고 이에 거절 의사를 표시하자 고의로 일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으며 결국 재계약도 하지 않아 일자리도 잃었다고 말했다. 우씨는 신 교수와 학교, 대한민국을 상대로 5000만원 상당의 손해배상소송을 냈다.

1심은 우씨의 피해를 인정했지만 2심은 달랐다. 2심은 박 전 시장측 주장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 불법행위로 인정되지 않았으므로, 이를 새롭게 인정하려면 따르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주의가 필요하다”고 판결했다.

그러면서 직장 내 성적 괴롭힘이 불법행위로 인정되려면 그 행위가 중대하고 철저해야 한다고 봤다. 그 이유로는 “피해자가 당한 경미하고 사소한 사항을 불법행위로 인정하면 그와 함께 활동하는 자의 자유를 부당하게 제한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무심코 던진 돌에 연못의 개구리는 죽는다

우 조교와 서울대 교수, 총학생회장 등이 性희롱사건 판결직후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중앙포토]

우 조교와 서울대 교수, 총학생회장 등이 性희롱사건 판결직후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중앙포토]

박 전 시장 측은 “피해자 입장에서 여성만의 독특한 경험을 고려하며, 합리적인 여성이 생각하는 바에 따라 위법성의 요소를 판단해야 한다”고 재판부에 주장했다. 이때 ‘무심코 던진 돌과 연못의 개구리’ 변론이 나왔다. 남자들은 장난삼아 별 생각 없이 여성에게 성적 농담을 하거나 신체 접촉을 하지만 여성들은 무심코 던진 돌에 연못의 개구리가 죽는 것처럼 그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느끼게 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법원은 “남녀 간의 관계를 투쟁적ㆍ대립적 관계로 평가하는 여성주의적 관점만을 표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남녀 관계에서 일어난 무의식적, 경미한 실수를 모두 법적 제재 대상으로 삼으면 활기차고 자유로운 남녀관계의 자유로움이 사라질 수 있다”고 이유를 썼다. “여성은 원하지 않는 성적 접근을 당할 때 명백히 표시해야 하고, 그런 노력이 여성의 지위를 스스로 보호할 수 있다”라고도 권고했다.

박 전 시장, "가장 기억에 남는 판결" 

항소심 판결을 받아든 원고는 상고했다. 상고심도 함께한 박 전 시장은 결국 180도 바뀐 대법원의 판단을 받아냈다. 대법원은 "남녀 간의 성적 관심 표현이 상대의 인격권을 침해해 정신적 고통을 준다면 위법해 허용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그러면서 이 위법성은 ▶쌍방 당사자의 연령이나 관계 ▶행위가 행해진 장소 및 상황 ▶성적 동기나 의도의 여부 ▶행위에 대한 상대방의 명시적 또는 추정적 반응 ▶행위의 내용과 정도 ▶일회적인지 계속적인지 등을 종합해 사회 공동체의 건전한 상식과 관행에 비춰볼 때 용인될 수 있는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고 썼다.

김재련 변호사가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열린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에서 텔레그램 비밀대화방 초대화면을 공개하고 있다. 원 안에 박 시장의 프로필 사진이 확인된다. [연합뉴스]

김재련 변호사가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열린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에서 텔레그램 비밀대화방 초대화면을 공개하고 있다. 원 안에 박 시장의 프로필 사진이 확인된다. [연합뉴스]

2016년 열린 박 전 시장의 북 콘서트에서 박 전 시장은 “가장 기억에 남는 판결이 뭔가”라는 질문에 이 판결을 꼽았다고 한다. 성범죄 피해자를 주로 대리해온 서혜진 변호사(더 라이트하우스 법률사무소)는 “성희롱 개념이 없던 90년대 이런 판결을 이끌면서 이 문제를 잘 알았던 분의 말로가 아이러니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결국 제왕적 권력을 가진 시장이 됐을 때는 본인도 원칙에 따르지 못했고, 성 평등 제도가 가장 잘 갖춰진 지자체임에도 주변에서 이를 거스르지 못했다는 점도 큰 문제”라고 진단했다.

냉정하고 정확하게 문제 밝혀내는 게 우리의 책임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중앙포토]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중앙포토]

이 사건 외에도 박 전 시장은 여성 인권을 증진하는 사건의 변론을 다수 맡았다. 1986년 벌어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당사자인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사건이 그랬고, 88년 성폭력 가해자의 혀를 깨물어 유죄 판결을 받은 '안동 주부 사건'의 항소심 변론도 했다. 성폭력 피해자였지만 가해자로 처지가 바뀐 이 여성은 박 전 시장을 비롯한 인권변호사들의 변론 끝에 항소심에서 '정당방위'를 인정받아 무죄 선고를 받았다. 박 전 시장은 2002년에는 우근민 제주도지사 성추행 사건의 민간진상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당시 우 지사의 성추행 혐의를 밝혀내기도 했다. 과거 박 전 시장의 변론을 받은 권 의원은 박 전 시장의 사망과 피고소 사실이 알려진 뒤 "냉정하고 정확하게 이 과정의 문제들을 밝혀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라고 말했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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