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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 겸비한 전장의 사자 덩화 “전쟁도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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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5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35〉 

덩화는 연합군의 재상륙작전을 두려워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서해안 경계를 강화했다. [사진 김명호]

덩화는 연합군의 재상륙작전을 두려워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서해안 경계를 강화했다. [사진 김명호]

6·25전쟁 정전회담 중국 측 대표 덩화(鄧華·등화)는 중국지원군 2대 사령관이었다. 덩화 이후에도 양더즈(楊得志·양득지)와 양융(楊勇·양용), 두 명의 사령관이 있었다. 정전 2년 후인 1955년 9월 신중국 첫 번째 계급 수여식이 열렸다. 초대 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는 원수 계급에 국방부장까지 겸했다. 양더즈는 대 군구(軍區) 사령관만 20년 이상 지내고 덩샤오핑에게 총참모장 자리도 물려받았다. 양융은 베이징군구 사령관과 중앙서기처 서기까지 거쳤다.

미국인 설립 명문 중학에 다니며 #법률가 꿈꾸던 부잣집 아들 덩화 #공산당 비밀집회 갔다 입당 자청 #청년 시절을 전쟁터 누비며 보내 #상관이었던 린뱌오 눈 밖에 나 #쓰촨성 부성장으로 쫓겨나

덩화도 상장(上將) 계급은 받았다. 4년 남짓 역임한 선양(瀋陽) 군구 사령관을 끝으로 시야에서 사라지다시피 했다. 린뱌오(林彪·임표)와 펑더화이의 묘한 인간관계 때문이었다. 권위 있는 해석을 소개한다.

린뱌오와 펑더화이 미묘한 관계

덩화는 횡성전투를 직접 지휘했다. 1951년 2월 중순 횡성 인근. [사진 김명호]

덩화는 횡성전투를 직접 지휘했다. 1951년 2월 중순 횡성 인근. [사진 김명호]

“항미원조 전쟁 초기, 덩화가 마오쩌둥에게 보고차 귀국한 적이 있었다. 업무를 마친 덩화는 옛 상관 린뱌오를 잊지 않았다. 역으로 가는 도중 시간을 냈다. 린뱌오는 꼼꼼하고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다. 전선 상황을 상세히 물었다. 부관에게 점심을 준비하라는 지시도 했다. 열차 시간이 촉박한 덩화는 초조했다. 용기를 내서 빨리 떠나야 한다는 말을 해버렸다. 린뱌오의 안색이 변했다. 덩화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나가라는 의미였다. 항일전쟁과 국·공전쟁 시절 린뱌오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던 덩화는 린뱌오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전선 사정이 급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지만,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린뱌오는 평소 우습게 알던 펑더화이 따라 조선에 가더니 나를 가볍게 본다며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1959년 펑더화이는 마오에게 한 방 날리고 실각했다. 신임 국방부장 린뱌오가 펑더화이 추종자들을 추려냈다. 펑더화이의 측근으로 분류된 덩화도 덩달아 화를 입었다.

쓰촨(四川)성 부성장으로 쫓겨나 농업 문제를 전담했다. 문혁 기간에도 호된 비판을 받았다. 1977년 군사과학원 부원장으로 복귀했지만 3년 후 세상을 떠났다.

덩화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외가도 큰 부자였다. 모친은 시집올 때 3대가 놀고 먹어도 될 전답과 패물을 들고 왔다. 5살 어린 지원군 공군사령관류쩐(劉震·유진)과 지원군 맹장 한센추(韓先楚·한선초)가 밭에서 소 끌고 땀 흘릴 때, 미국인이 설립한 명문 중학 학생이었다. 교장은 물론이고 교사들도 미국인 일색이었다. 수업도 모든 과목을 영어로 배웠다. 수학과 물리, 화학 성적이 우수했다.

북한 내무상 박일우의 방문을 계기로 기념사진을 남긴 중국 항미원조 지휘부, 왼쪽부터 부참모장 왕정주, 정치부 비서장 리정, 리정의 남편인 정치공작 담당 간스치, 박일우, 펑더화이, 천껑, 덩화. [사진 김명호]

북한 내무상 박일우의 방문을 계기로 기념사진을 남긴 중국 항미원조 지휘부, 왼쪽부터 부참모장 왕정주, 정치부 비서장 리정, 리정의 남편인 정치공작 담당 간스치, 박일우, 펑더화이, 천껑, 덩화. [사진 김명호]

소년 덩화의 꿈은 법률가였다. 17세 때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의 법정학교에 합격했다. 친구 따라 공산당 비밀집회에 갔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입당을 자청했다. 얼마 후 사달이 났다.

“학교에 잠입해있던 국민당 특무에게 신분이 폭로됐다. 나 대신 잡혀간 아버지는 모친이 돈을 쏟아부은 덕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고향 움막에 숨어있던 나는 농민들이 조직한 혁명군 따라 홍색 근거지 징강산(井岡山)에 들어갔다. 장정 도중 적이 버리고 간 손자병법을 노획했다. 보물처럼 끼고 다녔다. 틈만 나면 펴들었다.”

덩화는 청년 시절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린뱌오가 지휘하는 핑싱관(平型關)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뒀다. 1941년 6월 11일 팔로군 기관지 ‘진차지(晋察冀)일보’에 작가 저우얼푸(周而復·주이복)가 젊은 분구 사령관을 소개했다.

“수려하고 창백한 용모에 신기 어린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걷는 모습도 군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깨가 축 늘어진 문인 같았다. 고전과 영문에 능하고 붓글씨가 일품이라는 소문 그대로였다. 이런 사람이 포성과 불기둥이 난무하는 전장에선 사자로 변했다. 무슨 전투건 부하 지휘관들은 이 사람에게 의존하며 승리를 장담했다. 말수가 적고 적정(敵情) 판단이 정확했기 때문이다. 문인과 무사가 한 몸에 조화를 이루면 저렇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 제목이 덩화돤피엔(鄧華斷片), 덩화의 일면이었다. 실제로 덩화는 문·무(文武)와 군·정(軍政)을 겸비한 군인이었다.

일본 패망 후 국·공내전이 벌어졌다. 동북민주연군(제4야전군의 전신) 사령관 린뱌오는 덩화를 신임했다. 창바이산(長白山)에서 하이난다오(海南島) 점령까지 인연을 이어갔다.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고 중국지원군이 참전하자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덩화를 지원군 부사령관에 임명했다. 평소 덩화는 ‘전쟁도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항미원조 기간에도 농사에 관심이 많았다. 본국에서 320만 명이 배설한 인분을 들여와 북한 농촌에 공급했다.

덩화, 북한에 농업용 인분 공급

1950년 2월 14일, 중·소 양국의 협의로 뤼순커우(旅順口)에 주둔하던 소련 해군 철수안에 서명하는 덩화. [사진 김명호]

1950년 2월 14일, 중·소 양국의 협의로 뤼순커우(旅順口)에 주둔하던 소련 해군 철수안에 서명하는 덩화. [사진 김명호]

판문점회담에 덩화와 함께 참여한 지에팡(解方·해방)은 정전 2년 후 소장 계급을 받았다. 원수 계급장 받은 펑더화이가 발끈했다. “지에팡은 지원군 참모장이었다. 참모장이 소장이면 사령관인 나는 중장이 마땅하다”며 전화통을 집어 던졌다. 저우언라이가 겨우 진정시켰다.

“우리는 20여 년간 무장투쟁을 했다. 기라성 같은 지휘관들이 즐비하다. 지에팡은 국민당 소장 출신이다. 입당도 늦게 했다. 린뱌오의 참모장 오래 하고 하이난다오 해방에도 큰 공을 세웠다. 소장 서열 1번이니 중장이나 마찬가지다. 린뱌오도 불만이 없고, 대만에 있는 장쉐량(張學良·장학량)도 이해하리라 믿는다. 너도 참아라.” 저우언라이가 장쉐량까지 거론하자 펑더화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에팡은 동북 출신이었다. 소작농이었던 부친은 밥보다 교육을 중요시했다. 지에팡이 명문 학교에 입학하자 없는 돈에 마을 잔치를 베풀 정도였다. 지에팡도 부친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중학을 1등으로 졸업했다. 장쉐량 집안과 인연이 시작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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