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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한가운데 벌거벗은 여인, 감각·육체를 해방시키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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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5호 22면

[미학 산책] 조르조네 ‘잠자는 비너스’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 108x175㎠, 1510년. 이 무렵까지 벌거벗은 여인을 야외 풍경의 한가운데 놓고 그린 그림은 없었다. [드레스덴의 ‘옛 거장 회화갤러리’]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 108x175㎠, 1510년. 이 무렵까지 벌거벗은 여인을 야외 풍경의 한가운데 놓고 그린 그림은 없었다. [드레스덴의 ‘옛 거장 회화갤러리’]

조르조네(Giorgione, 1478~1510)라고 불리는 한 화가가 있다. 나는 그의 그림을 좋아한다. 그의 그림에 나오는 인물들은 세상모르고 잠을 자고 있거나, 아기에게 젖을 먹이거나, 아니면 머나먼 어떤 곳을 바라보고 있다. 사람과 사람의 행동이나 눈길, 목소리나 몸짓이 어떻게 이토록 평화로울 수 있는가? 그저 평면 위에 몇 가지 색채와 형태를 더함으로써 이처럼 시적이고 서정적이며 전원적인 세계를 구현할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지 않을 수 없다.

16세기 초 혁신적으로 등장 #“풍부한 색채, 감미로운 붓질” 평 #색감 조절해 인간의 해방 탐구 #엄격한 정신·이념 족쇄도 벗어

조르조네 그림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아마도 ‘잠자는 비너스’(1510)일 것이다. 이 그림은 현재 독일 드레스덴의 ‘옛 거장 회화갤러리(Gemäldegalerie Alte Meister)’에 있기 때문에 흔히 ‘드레스덴의 비너스’로 불린다.

400~500년 전에 그려진 그림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드레스덴의 ‘잠자는 비너스’도 수백 년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여러 수집가를 거쳤고, 그렇게 주인을 달리하는 사이 상당한 마모와 훼손에 시달렸다. 오래된 그림이 흔히 그러하듯이 ‘잠자는 비너스’의 원작자가 누구인지 오랫동안 논란거리였다. 조르조네가 그리기 시작했지만 완성하지 못한 채,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제자 티치안(Titian)이 하늘과 풍경을 마무리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너스도 티치안이 그렸다는 견해도 있다.

어떻든 ‘잠자는 비너스’는 한 여인이 붉은 천에 기대어 잠든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녀는 오른팔로 베개를 하고, 왼손은 아랫배에 놓은 채 한창 잠에 빠져 있다. 그녀의 팔과 등을 감싼 것이 붉은 천이라면, 허리 아래 엉덩이에서 발끝까지 깔려 있는 것은 베이지색의 부드러운 천이다. 아마 깊은 잠은 아닐 것이다. 잠든 그녀 뒤쪽으로 들과 산이 넓게 펼쳐져 있다. 가까운 언덕은 짙은 초록빛을 띠지만, 멀어질수록 초록색 농도는 조금씩 옅어진다. 바로 옆 언덕의 풀밭에는 잘려나간 나무 둥치가 하나 있고, 그 너머에는 한 그루 나무가 서 있다. 그림 오른편에는 더 높은 언덕에 서너 채 집들이 놓여 있고, 멀리에는 들과 산과 또 다른 집들이 보인다.

사후에 제자 티치안이 그림 완성한 듯

조르조네의 작품 ‘카스텔프랑코의 마돈나’, 200.5x144.5㎠, 1505년. [베네토 카스텔프랑코성당]

조르조네의 작품 ‘카스텔프랑코의 마돈나’, 200.5x144.5㎠, 1505년. [베네토 카스텔프랑코성당]

‘잠자는 비너스’에는 무엇보다 ‘벌거벗은 여인’이 있다. 여성이 벗은 몸으로 묘사되는 경우는 그 당시까지의 서구 회화사를 통틀어 없었던 일이었다. 적어도 이런 자세와 구도 속에서 이 정도 크기(108X175cm)로 그린 것은 1500년 무렵까지 매우 혁신적인 일이었다. 벌거벗은 여인을 야외 풍경의 한가운데 놓은 경우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 무렵 풍경이 묘사될 경우 그것은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했다. 풍경은 언제나 그림의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의 요소, 하나의 첨가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조르조네는 풍경을 그림의 포괄적 바탕이자 근거로 삼는다. 이것은 그가 1505년에 그린 ‘카스텔프랑코의 마돈나’에서도 잘 나타난다. 마돈나 그림은 대체로 덮개 있는 제단 위에 자리하는데, 이 그림에는 천장이 없다. 조르조네는 제단장식용 천장보다 자연풍경을 더 중시한 것이다.

‘잠자는 비너스’에서도 자연풍경은 벌거벗은 몸과 더불어 핵심요소다. 비너스는 치켜진 팔이나 사타구니에 놓인 손 때문에 에로틱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풍경적 요소와 여인의 잠든 모습 때문에 이 그림은 주관적이고 내밀하며 심리적으로 느껴진다. 독특한 아름다움은 이런 내밀한 개인성에서 나올 것이다. 이런 호소력 때문인지 이 그림은 그 후 많은 화가에게 모델이 되었다. 하지만 후세대의 그 어떤 그림들보다도 이 그림은 아련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무엇보다 조르조네의 색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비너스가 기댄 붉은 천이나 그녀 밑에 깔린 은빛 시트는 그리 강렬하지 않다. 그림 앞쪽의 잔디나 배경에 놓인 풀빛도 그렇다. 색채의 농도는 중화된 듯 은은하고 부드럽다. 눈을 자극하지 않는 이런 느낌은 매우 중요하다. 존-폴 스토나드는 이렇게 적었다.

조르조네

조르조네

“조르조네의 독창성은 단순히 주제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기술적 문제이기도 했다. 딱딱한 나무 패널 위에서보다는 캔버스의 부드러운 표면 위에서 어떻게 색채가 주변으로 어른거릴 수 있고 구축될 수 있는지 그는 그 방법을 특별히 탐구했다… 하지만 풍부한 색채와 두텁고 감미로운 붓질은 전적으로 그만의 것이다. 그의 스승 벨리니에게 있었던 혹독한 겨울의 기후는 조르조네에게 와서 여름의 따스함으로 되었고, 이 따스함은 자유에 대한 들뜬 감정을 일으킨다. 이런 자유의 감정 때문에 우리는 풍경 속에서 벌거벗은 채 잠에 빠져들고 싶어진다.”(더가디언 2016. 3. 11)

조르조네의 이 그림을 보고도 탁 트인 초원에 편안히 누워, 마치 이 여인처럼, 잠들고 싶은 충동을 못 느낀다면, 그는 돌처럼 굳은 사람일 것이다. ‘여름 기후의 따스함’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의 감정은 화석화된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느끼는 것은 감각의 해방이다. 감각의 해방은 곧 육체의 해방이고, 인간의 해방이다. 감각과 육체의 해방으로부터 정신이나 이념도 기존의 이런저런 족쇄로부터 풀려날 수 있다. 그렇다면 조르조네의 풍부한 색채는 삶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방면해 준다고 할 것이다. 아마 그의 회화사적 기여는 부드러운 색채조절을 통해 인간 삶의 해방을, 사회정치적 해방이 18~19세기에 와서야 제도적으로 가능했다면, 앞당긴 데 있을 것이다.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 분위기를 나는 ‘조르조네적 분위기’라고 부르고 싶다.

‘선보다 분위기’ 베네치아 화파의 거물

조르조네의 그림에서 색채는 왜 이리도 따스하고, 왜 이토록 뉘앙스 가득하게 빛나는가? 이런 물음은, 우리가 베네치아라는 도시의 지리적 위치와 물리적 환경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이 도시에서는 어디서나 물과 빛과 색채의 유희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는, 잘 알려져 있듯이, 모래언덕이 쌓여 생긴 큰 호수(潟湖) 안에 흩어진 여러 개의 섬으로 되어있다. 이곳에는 어디서나 물이 있고, 이 물결로 출렁인다. 베네치아공화국은 역사적으로 열린 도시였고, 국제적인 무역항이었다. 이 공화국은 이미 9세기부터 비잔틴 세계나 이슬람 지역과 거래하였고, 12세기 말 이후에는 에게해의 여러 곳에 식민지를 건설하기도 했다. 다양성과 국제성, 혼합성과 개방성은 베네치아의 특성이었고, 이것은 곧 조르조네의 회화적 관심과 이어진다. 그리하여 풍부하고 다채로운 색채는 빛에 대한 탐구와 그 미학적 결과로 자리한다.

조르조네를 위시한 베네치아 화파는 부드러운 색채와 분위기를 통해 회화적 효과를 내고자 했다. 그에 반해 피렌체 화파는 소묘와 스케치를 중시했다. 그래서 선적(線的) 작업에 골몰했다. 선을 지운다는 것은 사물과 사물의 윤곽을, 이 윤곽으로 인한 상호격리를 피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물과 사물은 서로 이어진다. 이 이어짐에서 분위기는 생겨난다. 조르조네는 색채를 통해 도상학적으로 독특한 효과 - 따뜻하고 내밀하며 정감있는 분위기를 창출하고자 애썼다. 그의 색채는 선적 논리와 규정을 넘어 자유로움과 우아함, 시적 우울과 향수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베네치아 화파와 피렌체 화파의 차이는 단순히 양식적 차이에 그치지 않는다. 거기에는 회화사적으로 매우 중대한 문제의식이 들어 있다. 베네치아 화파가 선보다 색채와 분위기를 중시하였다면, 그것은 고대 그리스로마 이래 지속된 엄격함이라는 족쇄로부터 벗어나 좀 더 자유로운 의식 속에서 대상을 다루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여기에는 ‘대체 회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물음이 들어있다. 조르조네의 색채적 분위기는 그 어떤 명제나 규정의 범주화를 넘어선다. 그것은 선이 전제하는 규정적 일의성에 대한 반발이자 저항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근대적 가치를 선취한다.

문광훈 충북대 독일언어문화학과 교수
충북대 독일언어문화학과 교수. 고려대에서 독문학을 공부한 뒤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독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수영론, 김우창론, 페터 바이스론, 발터 벤야민론 등 한국문학과 독일문학, 예술과 미학과 문화에 대해 20권 정도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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