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글와글

‘쓴다는 것은 가장 고독한 삶’…헤밍웨이, 와인에 위로받다

중앙선데이

입력 2020.07.18 00:20

지면보기

695호 24면

[와글와글] 『태양은 다시 뜬다』

그래픽=전유리 jeon.yuri1@joins.com

그래픽=전유리 jeon.yuri1@joins.com

『태양은 다시 뜬다』를 다시 손에 들었다. 헤밍웨이의 파리 시절 단골서점 셰익스피어앤컴퍼니에서 구입한 영어책과 번역본을 대조해 가며 읽는다. 미국 신문의 파리특파원으로 일하고 있는 주인공 제이크는 부유하듯 술에 젖어 지내다 친구들과 함께 스페인 팜플로나의 산페르민 축제에 참석한다. 날뛰는 황소처럼 며칠을 보내던 이들의 관계는 투우가 계기가 되어 산산이 깨지고 만다. 폭풍의 회오리가 지나고 난 뒤 주인공은 산세바스티안의 카페 마리나스에 홀로 남는다.

‘잃어버린 세대’ 기수 명성 얻은 소설
샤블리·카오르 등 다양한 술 등장
1차 대전 후 알 수 없는 불안 대변

‘와인+위스키’ 나오는 단편도 발표
귀국한 뒤에도 포도주 사랑은 계속

“나는 동행자로 포도주를 한 병 주문해 마셨다. 샤토 마고였다. 천천히 술맛을 음미하며 혼자 마시는 기분이 좋았다. 포도주는 좋은 동반자였다.”

남녀 사이 욕망·질투 섬세하게 묘사

산세바스티안은 미식가들 사이에 유명한 바스크 지방의 아름다운 해안 도시, 샤토 마고는 보르도 지방의 고급 와인이다. 붉은색 포도주는 열정과 외로움, 변치 않는 친구를 상징한다. 소설의 막바지 장면에서도 주인공은 옛 애인을 만나 포도주로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

“우리는 보틴 식당의 2층에서 점심을 먹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레스토랑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는 애저구이 요리를 먹고 리오하 알타를 마셨다. 브렛은 별로 먹지 않았다.”

보틴(Botin’s)은 마드리드의 전통식당이며, 리오하 알타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와인 산지 이름이다. 이 소설에서는 현란할 정도로 다양한 술이 등장한다. 백포도주 샤블리, 적포도주 카오르, 물을 섞어 마시면 좋다는 코르시카 와인, 포도주에 브랜디를 혼합한 샹베리 베르무트, 식전에 마시는 위스키 소다 아페리티프, 칵테일 마티니와 잭로스, 가짜 압생트 페르노, 스페인 브랜디 아가르디엔테, 약초와 꽃으로 만든 이탈리아 리큐어…. 이처럼 술은 1차대전 직후 파리에서 보헤미안처럼 지내던 이들의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대변한다. 1926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시대와의 불화, 남녀 사이의 원초적 욕망, 성공과 질투 같은 인간의 미묘한 감정의 선을 섬세하게 묘사했다는 평가 속에 헤밍웨이에게 ‘잃어버린 세대’의 기수라는 명성을 안겨 준다.

1921년 부인과 함께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는 ‘토론토 스타’ 특파원 자격이었다. 소시지와 빵 한 쪽, 1L의 와인을 가방에 챙겨 넣어 센강 가로 걸어가 흘러가는 강물과 사람들을 관찰하곤 하였다. 파리는 그에게 인생 정거장이었고 이곳에서 와인과 글을 결합한 와글와글 인생이 시작된다.

“유럽에서 우리는 와인을 음식처럼 건강하고 일상적인 것, 행복과 웰빙 그리고 기쁨을 가져다주는 위대한 것으로 생각하곤 했다. 와인을 마시는 것은 잘난 척하거나 허세 혹은 컬트를 표시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밥 먹듯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와인이나 맥주 혹은 다른 반주 없이 식사한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단맛이 나거나 지나치게 무거운 것 빼고는 모든 포도주를 사랑했다.”

같은 시기 파리에 체류하고 있던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와 함께 리옹으로 가서 본인은 맛있는 알제리 포도주를 즐긴 반면, 피츠제럴드는 위스키를 페리에 탄산수에 타서 마신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가 작가의 삶을 결심하고 신문사를 그만두자 수입은 바닥에 이르렀다. 점심값을 아끼기 위해 뤽상부르공원을 산책하다 돌아올 정도였다. 회고록 『움직이는 연회』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스물다섯 나이에 건장한 체구를 타고난 나는 끼니를 거르면 몹시 허기가 졌다. 하지만 배고픔은 나의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해 주었다. 나중에 보니 내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식욕이 강하거나 미식가이거나 혹은 식탐이 있거나 술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귀국해서도 ‘와이오밍 와인’이란 단편을 발표할 정도로 포도주 사랑은 계속됐다. 프랑스 남동부 생테디엔 출신의 이민자가 와인에 커피를 타서 마시거나 와인에 위스키를 섞어 마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일명 드라큘라주의 원조이다. 헤밍웨이는 포도주에 갈색 리큐어를 섞어 마시곤 했다.

“나의 모히토는 라 보데기타에서, 다이키리는 엘 프로리디타에서!”

쿠바에 전해지는 칵테일 어록을 놓고 그가 어떤 술을 더 좋아했는지 논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큰 의미는 없다. 방문한 지역의 술을 즐겼으니까. 오스트리아 스키 산장에서는 슈납스, 싱싱한 굴이 있으면 표면에 물방울 가득한 백포도주를 주문했다. 『열하일기』에서 방문하는 지역의 다양한 술을 시음하던 연암 박지원처럼 그는 진정한 애주가였고 특별히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공통점도 있다.

매일 글쓰기 진행 상황 차트로 적어

두 차례의 세계대전, 스페인 내전을 겪었고 권투를 했으며, 사냥은 큰 동물만 골랐다. 바다낚시에서도 청새치 같은 대형 어종과 힘을 겨루길 좋아했다. 생과 사가 엇갈리는 고독한 현장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1954년 노벨 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헤밍웨이는 ‘쓴다는 것은 최고로 고독한 삶’이라고 강조했던 그에게 와인과 술은 평생 변치 않는 친구였다. 술보다 더 좋아했던 것은 글이었는지도 모른다.

놀러 나가기 전 반드시 일정량의 글을 썼다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종이 상자 옆면을 뜯어서 만든 차트에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고’ 매일 글쓰기 진행 상황을 적어 두었다. 450, 512, 675, 1250 등 숫자가 그것이다. 평생직업이 가능한 헤밍웨이의 비결이었다.

손관승 인문여행작가 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특파원과 iMBC 대표이사를 지낸 인문여행 작가.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me,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 등을 썼다.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