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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전설의 스파이’ 조르게가 소련 구했다…역사 진로 바꾼 정보의 파괴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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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5호 12면

리더십의 결정적 순간들 - ‘스탈린의 007’은 어떻게 세상을 뒤집었나

암호명 람자이. 모스크바에 있는 ‘역사상 최고의 스파이’ 조르게의 조각상, 음지의 장벽에서 벗어나 양지로 나온 이미지다.

암호명 람자이. 모스크바에 있는 ‘역사상 최고의 스파이’ 조르게의 조각상, 음지의 장벽에서 벗어나 양지로 나온 이미지다.

첩보는 국가 본능이다. 정보 게임은 인간의 충동이다.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 시대다. 양국은 기술 정보전에서 충돌한다. 북한 체제는 폐쇄다. 지난 4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건강 이상설로 시끄러웠다. 최고 권력자의 신변·동향은 긴박한 첩보 소재다.

“일본군 북진 아닌 남방으로 진격” #일왕 주재 회의 기밀 낚아채 타전 #히틀러 공격에 모스크바 함락 위기 #스탈린, 극동군 투입해 방어 성공 #이념의 열정으로 청년기 조국 배신 #‘첩보 귀재’ 직업은 독일 신문기자 #북한 영도자 신변, 긴박한 첩보 소재 #문재인 정권 ‘정보 마인드’ 세련돼야

정보가 세상을 장악한다. 나는 전설의 스파이를 떠올렸다.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 ·1895~1944)-. 그는 공산주의 소련(지금 러시아)의 간첩이었다. 국적은 독일. 활동 무대는 일본이다. 1941년 6월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 9월 들어 수도 모스크바가 함락당할 위기다. 조르게의 특급 정보가 타전됐다. “제국 일본군은 북진하지 않는다.” 소련의 스탈린은 극동군을 모스크바 방어에 투입했다. 그것이 소련을 구했다. 세계사의 흐름이 바뀌었다.

붉은 군대 GRU 총수가 발탁했다

독일군 병사(21세) 시절의 조르게.

독일군 병사(21세) 시절의 조르게.

코로나19가 퍼지기 전이다. 모스크바의 붉은광장 근처다. 나는 지하철(키타이 고로드 역) 7번 노선을 탔다. 여섯 번째가 폴레자옙스카야 역. 2번 출구에서 8분쯤 걸었다. 작은 공원이 나온다. 거기에 조르게의 조각상이 있다. 받침대에 꽃다발이 놓였다. 주인공은 뒷벽을 뚫고 나와 서 있다. 트렌치 코트 차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미지는 영화 속 007 제임스 본드다. 원작자 이언 플레밍의 인물평이 떠오른다. “조르게는 역사상 가장 가공할(formidable) 스파이다.” 조르게는 스탈린의 제임스 본드였다. 코드 네임은 람자이(Рамзай).

출판업자 제리코프가 나를 부른다. 1989년 나는 모스크바에 갔다. 야당 김영삼 총재의 그곳 방문 때다. 그때 사귄 제리코프의 설명이다. “소련이 조르게의 실존을 인정한 게 일본에서 사형당 한 지 20년 뒤다. 그것으로 그는 익명의 어둠에서 벗어났다. 그게 조각 콘셉트다.” 조각상(1985년 세움) 왼쪽 위 글귀가 확인한다. “리하르트 조르게 (Рихард Зорге) 소련 연방 영웅에게(Герою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조르게는 아제르바이잔(당시 제정 러시아의 캅카스 지역) 수도 바쿠에서 태어났다. 독일인 아버지는 바쿠의 유전기술자, 어머니는 러시아인. 아버지가 실직, 귀국했다. 그는 1914년(19세) 1차 세계대전의 독일군 병사다. 세 차례 부상을 당했다. 야전병원에서 그의 감수성은 재구성된다. 그의 마음은 전쟁의 환멸과 ‘독일 제국’에 대한 분노로 가득했다. 간호사는 그를 마르크스 사상 공간으로 이끌었다. 조르게는 함부르크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독일 공산당에 입당(1919년)한다. 이후 소련 이주→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요원→소련 시민권 획득(1925년)이다. 소련군 총참모부 정보국(GRU) 총수 얀 베르친은 그의 잠재력에 주목했다. 그것은 준수한 외모, 친화력, 공산주의 이론, 외국어(러시아·프랑스어·영어) 능력이다. 제리코프는 “GRU 스파이 조련의 기본은 이념의 열정을 주입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조르게는 공산주의를 인류의 미래로 믿었다. 그 신념은 야수의 영악함으로 진화했다. 그는 청년기의 조국을 배신한다.

1932년 GRU의 도쿄 미션이 그에게 떨어졌다. 소련의 숙적은 독일과 일본. 동북아는 요동쳤다. 1931년 9월 만주(중국 동북3성)사변→1932년 3월 만주국 출현이다. 관동군(만주국 주둔 일본군)과 소련 극동군이 대치했다. 스탈린은 일본을 두려워했다. 그것은 1905년 러일전쟁 패배의 트라우마다. 조르게의 임무는 일본 군부의 동향·전략 파악이다.

나치의 언어학에 익숙해지기

조르게 얼굴 사진을 넣은 소련의 영웅 기념우표. 사후 21년(1965) 만에 발행. [중앙포토]

조르게 얼굴 사진을 넣은 소련의 영웅 기념우표. 사후 21년(1965) 만에 발행. [중앙포토]

독재자 스탈린의 외교는 현란했다. 그는 독일과 불가침 조약(1939년 8월)을 맺었다. 그 직후(9월 1일)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한다.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그 후 일·소 중립조약(41년 4월)이다. 두 달 뒤(6월 22일) 두 악마의 싸움이 시작됐다. 히틀러의 소련 공격(바르바로사 작전)이다. 독일의 전격전은 파죽지세였다. 스탈린은 전황을 점검했다.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북진해 올 것인가.” 동서 협공은 스탈린에게 최악이다. 그 정보 탐지가 조르게의 임무였다(오웬 매튜스 『완전무결한(Impeccable)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 2019년 6월).”

그 8년 전인 1933년 5월 조르게는 독일로 갔다. 경력 세탁은 세련됐다. 그는 나치 총통 히틀러의 저서(『나의 투쟁』)를 열독했다. 나치즘 언어에 익숙해졌다. 이제 나치 열성당원이다. 그는 선전장관 괴벨스와 인연을 맺었다. 주일 독일무관 오이겐 오트 대령을 소개받았다. 9월에 그는 일본에 도착했다. 유력지 프랑크푸르트자이퉁의 도쿄 특파원 신분이다. 언론인 위장은 그의 노하우다.

시바 료타로 “나는 조르게의 팬이다”

일본 도쿄의 다마 묘원에 있는 조르게 무덤. 2018년 5월(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 참배하는 미하일 갈루진 일본 주재 러시아대사(주일 러시아대사관 트윗 캡처).

일본 도쿄의 다마 묘원에 있는 조르게 무덤. 2018년 5월(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 참배하는 미하일 갈루진 일본 주재 러시아대사(주일 러시아대사관 트윗 캡처).

나는 도쿄에 갔다. 조르게 신분증(내각정보국 발행)은 능란한 속임수다. ‘국적-독일, 직업-특파원, 주소-도쿄 아자부(麻布)’다. 나는 지인 나가타 히로시(무역업)와 그 주소지를 살폈다. 그의 집은 오래전에 헐렸다. 그 위는 고가도로. 나가타는 “조르게는 플레이보이로 소문났다. 공개적인 여성 편력은 시선을 분산시킨 기만술”이라고 했다.

조르게는 일본 전문가로 변신했다. 책장에 고사기(古事記)·일본서기도 꽂혔다. 그는 “일본 역사 연구는 비합법 활동을 위장하려는 것”(『옥중수기』)이라고 했다. 일본의 옛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의 평가다. “나는 조르게 팬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 일본 정세를 알 수 있다. 이런 기막힌(すばらしい)두뇌가 있을까.” (『대담집 일본인 얼굴』) 1938년 오트는 대사로 승진(장군 진급)했다. 조르게는 외교 전문도 대신 썼다. 그는 오트의 부인과 내연관계였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조르게의 조직망은 독일·일본 양쪽에서 권력 이너서클에 접근할 수 있는 현대 첩보역사의 독보적인(unique) 사례다.”(『완전무결한 스파이』) 그 첩보단의 와일드카드는 아사히신문 기자 출신 오자키 호쓰미(尾崎秀實). 그는 도쿄대재학 시절 공산주의에 심취했다. 두 사람은 상하이에서 만났다. 좌파 저널리스트 아그네스 스메들리(미국인)의 소개였다. 오자키는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磨) 총리의 측근으로 활약했다(내각 촉탁). 그는 고노에 정치 연구 모임 ‘조쇼쿠가이(朝食會)’의 멤버다.

조르게의 출생지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 있는 기념 조각상(1981년 제작). 얼굴은 가려져 있다. 기밀을 낚는 사냥꾼의 날카로운 눈매를 압축해 묘사했다.

조르게의 출생지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 있는 기념 조각상(1981년 제작). 얼굴은 가려져 있다. 기밀을 낚는 사냥꾼의 날카로운 눈매를 압축해 묘사했다.

조르게의 1941년 5월 30일자 보고다. “독일 정부가 6월 말 소련을 공격한다고 오트 대사에게 통보했다(암호명 ‘람자이’ 보냄).” 스탈린은 특급 정보를 묵살했다. 음흉한 통치자의 오판이다.그는 조르게를 이중간첩으로 여겼다. 음모와 의심은 충돌한다. 그 정보대로 스탈린은 기습을 당했다. 석 달 뒤 독일군의 위치는 모스크바 턱밑이다. 소련의 최후 희망은 극동·시베리아 부대 투입이다. 스탈린은 주저했다. 일본 관동군의 침략 가능성 때문이다. 독일은 추축(樞軸)동맹을 내세워 일본의 북진을 압박했다. 역사의 숨 가쁜 분기점이다.

대본영(大本營·통수부)의 시선은 이미 남방으로 향했다. 1년 전 프랑스·네덜란드가 독일에 항복했다. 이들의 동남아 식민지에 힘의 공백이 생겼다. 일본은 인도네시아의 석유에 주목했다. 노몬한 전투(1939년 5~9월) 패배의 후유증도 컸다. 노몬한은 만주국 변방(현 중국 내몽골). 거기서 관동군은 소련군에 참패했다. “그로 인해 일본군 표적이 북방에서 멀어졌다, 남방과 미국으로 바뀌었다.”(스튜어트 골드먼 『노몬한: 2차대전을 형상화한 붉은 군대 승리』 2013년)

스탈린의 냉혹한 배신 “조르게 모른다”

조르게 동상 앞에 선 박보균 대기자.

조르게 동상 앞에 선 박보균 대기자.

1941년 7월 28일 일본군은 프랑스령 사이공(현 호찌민시)에 진주한다. 미국의 대응은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 금지다. 1941년 9월 6일 쇼와(昭和) 일왕 주재 어전(御前)회의. ‘제국 국책수행 요령’이 짜였다. 그것은 “10월까지 미국과의 협상에 실패하면 미국·네덜란드·영국에 개전(開戰)한다”는 내용. 일본의 공격선이 남방과 진주만으로 확정됐다. 그것은 역사 전개의 극적 순간이다. 조르게는 권력 심층부의 극비 기밀을 낚아챘다. 오자키의 정보공작도 주효했다.

9월 14일 그는 GRU에 타전했다. “일본은 북방으로 진격하지 않는다. 석유자원 확보를 위해 남진한다.” 그것은 환호의 낭보였다. 스탈린은 극동·시베리아 부대를 모스크바로 이동시켰다. 그 규모는 18개 사단, 전차 1700대, 전투기 1500대. 겨울이 빨리 왔다. 설상복 차림의 시베리아 정예부대가 출몰했다. 독일군의 기세가 꺾이면서 퇴각했다. 결정적 정보는 세계사 흐름을 뒤집는다.

조르게의 임무 완수다. 그는 한 달 후(10월 18일) 체포된다. 일본 정보경찰(특고)과 헌병대는 1년 전부터 조르게를 추적했다. 체포 뒤 상황은 비정한 반전(反轉)이다. 스탈린의 냉혹한 배신이다. “조르게와 소련은 관계없다.” 소련은 일본의 포로 교환 제안도 일축했다.

“조르게의 전설적 역량은 ‘정보가 힘’이라는 점을 이해한 덕분이다(『완전무결한 스파이』).” 한반도는 소용돌이다. 미국과 중국·일본, 남북한의 첫 경쟁은 첩보 무대에서다. 정보 수집은 진실의 추적이다. 문재인 정권의 취향은 사실보다 이념이다. 정보 마인드의 단련이 절실하다.

도쿄의 조르게 무덤…하나코와 러시아의 기억

하나코

하나코

조르게 유산은 압도적이다. 그는 소설가·학자·영화감독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는 100여 편 소설의 소재다. 일본 도쿄 외곽의 다마(多磨)묘원. 그곳에 조르게 무덤이 있다. 검은색 묘비에 ‘소련영웅 리하르트 조르게’(러시아어), ‘妻 石井花子’(처 이시이 하나코)라고 새겨져 있다. 하나코(1911~2000·사진)는 조르게의 연인. 1935년 긴자의 술집(라인 골드) 종업원 시절에 만났다. 조르게는 스가모 구치소에서 처형(1944년 11월 7일)된다. 하나코는 시신을 수습해 다마 묘원에 묻었다. 교수형 직전이다. 조르게의 최후 언어는 사상의 조국에 대한 충성이다. “세키군(赤軍), 고쿠사이 교산토(국제 공산당), 소비에트!” 소련은 그를 외면했다. 그의 두 번째 아내 카티야 막시모바는 소련에 있었다. 조르게 체포 직후다. 카티야는 감시를 당했다. 1943년 시베리아 유배 중 숨졌다. “조르게는 오랫동안 자신을 기다려 온 아내에 대한 소련의 악랄한 배은망덕(ingratitude)을 알지 못할 것이다(『완전무결한 스파이』).” 그것은 공포 통치 체제의 생리다.

1964년 초 흐루쇼프 집권 때다. 그는 첩보영화 (‘조르게, 당신은 누구인가’ 프랑스·독일 합작)를 봤다. 흐루쇼프는 영화의 진실을 확인했다. GRU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것으로 그의 묘비명은 소련 영웅이다. 소련은 그의 도쿄 무덤을 챙겼다. 주일 러시아대사관은 그 전통을 계승했다. 2차대전 승전일(5월 9일)에 참배한다. 그 장면은 조국 헌신에 대한 국가의 기억 행위다.

모스크바(러시아)·도쿄(일본)= 글·사진 박보균 중앙일보 대기자 bg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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