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에 창업해 글로벌 1위 화장품 ODM 기업으로 키운 코스맥스 이경수 회장
월급쟁이 생활 20년, 그리고 회사 경영 28년.
AI, 선택 아닌 생존 문제 불구 #반발 연구원 설득에 1년여 노력 #직원·회사 방향 같아야 성과 나 #“같이 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
매출 2조원이 넘는 세계 1위 화장품 ODM(제조업자개발생산) 기업으로 성장한 코스맥스 창업주 이경수 회장(74)의 지난 인생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이 회장은 아무 산업기반도 없는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그야말로 무(無)에서 유(有)를 일궈낸 고(故) 이병철(삼성)·정주영(현대) 같은 창업 1세대나, 혹은 세상에 막 태동하기 시작한 IT기술을 먼저 받아들여 단숨에 이전 세대가 일군 부를 뛰어넘은 이해진(네이버)·김범수(카카오) 같은 인터넷벤처 1세대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한국에 또 하나의 창업 신화를 써내려가고 있는 인물이다.
창업 시기도, 배경도, 업종도 모두 다르지만 다른 창업가들과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오랜 직장생활 덕분에 임직원들 마음을 제대로 헤아릴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약대(서울대 약학과) 졸업 후 제약회사(동아제약) 세일즈맨과 광고대행사(오리콤) AE를 거쳐 다시 전공을 살려 제약회사(대웅제약)로 돌아가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던 마흔여섯의 나이에 창업한 그는 월급쟁이 출신 경영자답게 남다른 경영 스타일로 직원과 소통하며 회사를 급성장시켜왔다.
이 회장이 요즘 꽂혀있다는 AI(인공지능)를 회사에 도입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AI 도입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라면서도 이 회장은 직원들을 다그치며 밀어붙이지 않았다. 내 마음이 절박하다고 성급하게 강행하는 대신 모두의 이해를 구하는 지난한 과정을 밟고 있다. 연구실과 붙어있는 판교이노밸리 집무실에서 이 회장을 만나 이런 선택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다음은 일문일답.
- AI에 관심이 많다던데.
- “우선 내가 생각하는 화장품업계의 세 가지 핵심 키워드, 그러니까 소비자·스피드·글로벌 얘기부터 해야겠다. 앞으로 화장품 업계는 수없이 많은 브랜드가 쏟아지면서 소량, 더 나아가 소비자별 개인 맞춤 시대로 갈 수밖에 없다. 지금은 대량생산 제품을 사지만 앞으로는 단가는 좀 올라가더라도 내 피부에 딱 맞는 제품을 주문 제작하는 방향으로 트렌드가 바뀔 것이다. 그런 니즈를 맞추기 위해선 스피드가 관건이다. 화장품 처방(원료 배합 등)에 걸리는 시간이 지금은 빨라야 3~6개월, 완전히 신제품인 경우 1년 넘게 걸리기도 한다. 피부 진단 후 당장 제품을 받기를 원하는 소비자들한테 그렇게 오래 기다리라고 할 수는 없다. 만약 지금처럼 한정된 수의 연구원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일이 처방을 짜는 게 아니라 AI가 대신 하도록 처방 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면, 그리고 이를 전 세계적인 공급망에 적용하면 어떨까. AI에 대한 관심은 이렇게 시작했다.”
- 직원들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나.
- “전혀. 오히려 처음엔 다들 자기 밥그릇 떨어져 나가는 줄 알고 펄쩍 뛰더라. 우리 회사 연구원들은 처방이 연구실 밖으로만 나가도 큰일 나는 줄 아는데 아예 처방을 AI에게 시킨다고 하니 당연히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다.”
- 반발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였나.
- “아니다. 전통적 생산방식에서 AI 기반 제조로 방향을 틀려면 핵심 인력인 연구원들을 반드시 설득해야 한다. 나 혼자 아무리 중요성을 강조해봐야 그게 먹히나. 그래서 1년 전부터 한양대 김창경 교수(과학기술정책학과)를 회사로 초빙해서 한 달에 두 번씩 강의를 듣고 있다. 당초 1년 계획이었는데 최근에 1년 더 연장했다. 한마디로 세뇌하는 거다. 기초부터 같이 공부했다. 이제 임원 레벨은 얼추 AI 도입의 필요성에 대해 동의를 한다. 연구원 설득은 더 어렵지만 처음보다는 상당히 진척이 됐다고 본다.”
- AI가 사람을 대체할 수 있다고 보나.
- “사람과 AI가 다른 지점이 창의성이라고들 하는데, 사실 창의적 영역으로 여겨지던 소설·그림·작곡도 이미 AI가 하는 세상이다. 심지어 냄새도 맡는다. 와인의 떫은맛도 소믈리에보다 더 정확히 구별해낸다고 한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사람이 했던 건 전부 다 AI가 더 잘할 수 있다는 얘기다. AI보다 앞서려면 이제껏 안 한 걸 해야 한다. 연구원의 역할도 그렇게 달라져야 한다. 이런 정도 인식수준까지는 왔다. 바둑 AI가 프로 기사들 실력을 키워주듯이 AI를 조수로 쓰고 플러스알파의 다른 일을 하라고 얘기한다. 대체는커녕 더 필요하다. 앞으로 웬만한 처방은 AI가 하는 세상이 올 텐데, 우리가 손 놓고 있으면 다른 회사에 선점당한다. 우리가 경쟁사보다 먼저 빨리 가야 하지 않나.”
- 경쟁은 치열하고 갈 길은 먼데 내부 직원 설득에 1년을 허비했다.
- “결코 허비가 아니다.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최종 목적지까지 가는 길은 이게 더 수월하다.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길이다. 내가 진심으로 동의해서 일할 때와 위에서 시켜서 억지로 할 때 내는 결과는 천양지차다. 직원과 회사의 나가는 방향이 일치할 때 비로소 큰 힘을 발휘한다. 큰 결정이라면 합심해서 해 나가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준비 기간을 두면 결과에 도달하는 과정이 짧아진다. 거꾸로 준비 기간이 없으면 과정이 오래 걸린다. 어떤 방식을 취해도 결국 시간은 필요하다. 먼저 쓰느냐 나중에 쓰느냐의 선택인데, 먼저 쓰는 게 비효율적으로 비치지만 그게 맞다.”
- 웬만한 오너라면 추진력 운운하며 강행했을 텐데. 월급쟁이 출신이라 달랐을까.
- “글쎄. 직원들 마음을 더 잘 아는 건 사실이다. 아는 걸 나쁘게 이용하면 해롭지만 좋게 활용하면 직원에게 이롭고 결과적으로 회사에도 이로운 정책을 결정할 수 있다. 가령 코로나19 사태 때 정부 방침보다 더 선제적으로 재택근무를 결정하고 근무시간을 조정한 것처럼. AI 도입에 앞서 같이 공부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단 전제조건이 있다. 큰 방향 전환을 앞두고 직원 설득 작업을 하는 동안 회사는 너무 늦지 않도록 할 수 있는 필요한 것을 사전에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시대 흐름에 뒤처지지 않는다.”
- 코스맥스는 AI 관련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
- “그건 대외비다. 다만 최고 전문가가 이미 6개월 이전부터 우리 회사에 들어와서 함께 일하고 있다고만 말하겠다. 우리 혼자 힘으로는 버겁다. 다행히 한국엔 뛰어난 AI 전문가가 적지 않다. 그런 외부 힘과 합쳐 협업하고 있다.”
- 혹시 올해 서울대에 50억원의 연구개발비를 지원하기로 한 것도 그 일환인가.
- “서울대 프로젝트와는 별개다. 서울대의 모든 단과대 교수들로부터 같이할 수 있는 연구 과제 지원을 받아 그중 20개를 추려 프로젝트 진행 중이다. 흔히 화학공학과 같은 곳과의 산학협동을 생각하는데 전자·기계, 심지어 미대 교수가 전 세계인의 피부색을 연구하는 작업 등 다양한 주제를 망라한다.”
- 코스맥스의 산학협동이나 AI 도입 등의 행보에 로레알의 영향이 있나.
- “맞다. 처음엔 세계 1위 화장품 기업인 로레알의 앞선 시스템을 우리가 일방적으로 배웠지만 지금은 서로 배우는 관계다. 로레알은 연구소 이름부터가 기업들이 통상 쓰는 R&D(연구개발)가 아니라 R&I(연구혁신)일 정도로 혁신적인 생산방식에 투자를 많이 하는 회사다. 코스맥스는 2014년 로레알의 4번째 파트너(매출 규모)로 올라섰고 지금은 중국 기업과 1, 2위를 다툰다. 이 과정에서 로레알의 오픈 디벨로프먼트 시스템 도움을 많이 받았다. 1년 6개월에서 2년 걸리던 신제품 개발 기간이 이 시스템 도입 후 6~9개월로 단축됐다. 일종의 로레알 맞춤형 사전준비 시스템이다. 이런 경험을 해보니 AI 제조방식 선점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욱 크게 깨닫게 됐다.”(※코스맥스는 로레알 그룹 브랜드인 이브생로랑, 슈에무라를 비롯 전세계 600여 개 고객사가 있다.)
- 요즘 청년실업이 심각하다. 창업을 권하나.
- “직장을 구할 것인가, 창업을 할 것인가 보다 우선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라고 말하고 싶다. 직장을 다니고 있다면 현업을 충실히 해서 실력을 먼저 인정받고 신뢰를 쌓아야 (창업) 기회가 왔을 때 좋은 파트너를 구해 사업에도 성공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젊은이들은 꼰대 같은 발언이라고 하지만.”
- 최근 장남에 대표이사 자리를 물려줬다. 오너 경영 체제로 가는 건가.
- “한국 기업도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서구 기업처럼 점점 주주는 주주로만 남고 경영은 경영을 잘하는 사람이 하는 그런 시절이 올 거라고 본다. 그런데 일본에서 볼 수 있듯이 전문경영인 체제로 가다 문제가 있으면 오너가 등판하기도 한다. 주주냐 아니냐보다 결국 주인의식이 문제다. 제아무리 유능한 전문경영인이라도 주인의식 없이 재임기간 동안 성과를 내겠다고 적절한 투자를 안 한다면 회사가 제대로 굴러가겠나. 자기는 굶더라도 미래를 위해 준비할 건 한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질문에 답하자면, 아직은 모르겠다. 시대 흐름에 맞춰 오너 체제로, 혹은 전문경영인으로도 갈 수 있다고 열어놓고 있다. 중요한 건 누가 하더라도 세계 최고의 화장품 연구소가 돼야 한다는 점이다. 세상이 바뀌고 유통이 바뀌어도 꼭 필요한 건 연구개발 실력이고, 그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