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비서실에서 멈춘 성폭력 매뉴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김원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원배 사회디렉터

김원배 사회디렉터

인권변호사 출신의 시민운동가로 페미니스트를 자처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때 대책에도 #전 비서의 고통 호소는 외면당해 #시장의 일탈·독주 막을 장치 필요 #지방의회 선거제 개편도 논의해야

2011년 10월 취임한 박 전 시장은 이듬해 1월 성희롱·성차별 없는 평등한 직장 만들기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미투가 벌어지기 전에 이런 계획을 냈으니 시대를 앞서간 것이라 볼 수 있다. 2014년 무관용 원칙에다 피해자 보호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은 관리자를 징계하는 대책이 나왔다. 2018년엔 제3자 익명 제보 제도와 2차 피해 방지 대책이 나오는 등 대응 매뉴얼은 정교해졌다.

하지만 매뉴얼은 서울시장 비서실엔 적용되지 않았다. 피해자는 지난 13일 대리인이 참석한 기자회견에서 성추행이 4년간 지속했다고 폭로했다. 피해자가 서울시 내부에 도움을 청했지만 "(시장님은) 그럴 사람 아니다” "비서는 시장 심기를 보좌하는 역할”이라는 반응이 돌아왔다고 한다. 성추행과 관련한 서울시 참모진의 인식은 선진적인 매뉴얼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그때 누구라도 매뉴얼에 따라 피해자의 손을 잡았다면 오늘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피해자는 13일 입장문에서 “50만 명이 넘는 국민의 호소에도 바뀌지 않는 현실은 제가 그때 느꼈던 ‘위력’의 크기를 다시 한번 느끼고 숨이 막히도록 합니다”라고 밝혔다. 50만 명의 호소란 박 전 시장의 서울특별시장(葬)을 반대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다.

서소문 포럼 7/16

서소문 포럼 7/16

박 전 시장 장례를 이유로 침묵을 지키던 서울시는 15일 민관합동조사단을 구성하겠다고 밝혔지만 피해자에게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여러 의문점을 제대로 해명하지 않았다. 그렇게 2차 가해를 우려했다면 논란 속에 서울특별시장을 강행할 이유도 없었다. 지금 논란이 되는 피고소 사실 사전 보고설 같은 것은 2차 가해와는 관련이 없는 내용이다.

서울시 집행부는 민관합동조사단 출범 전이라도 박 전 시장의 극단적 선택과 관련한 기본적인 사실은 밝혀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서울시의 태도를 보면 민관합동조사단이 얼마나 알맹이 있는 결과를 내놓을지 신뢰하기 어렵다. 성추행 사건의 진실과 수사기밀 유출 의혹은 검찰이나 경찰에서 규명될 수밖에 없다.

이와 별도로 지방자치단체의 운영 체제에 대한 재검토도 필요하다. 지방자치단체장은 임기를 거듭할수록 소왕국을 구축할 가능성이 크다. 공무원에 대한 인사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 단체장 밑에서 승진을 하게 되면 그의 사람이 된다. 이를 발판으로 정계에 진출할 수 있으니 충성 경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

박 전 시장의 극단적 선택으로 별정직으로 임용된 27명이 서울시를 떠났다고 한다. 과연 서울시장의 보좌 조직으로 이런 정도의 별정직 인력이 필요한지 궁금하다. 이 조직은 박 전 시장의 대선준비 캠프였다고 보는 게 맞다. 대권을 꿈꾸는 다른 광역단체장도 사정이 비슷할 것이다. 시민이나 도민의 세금으로 대선 캠프를 운영하는 게 과연 합당한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이런 단체장을 견제하는 게 지방의회의 역할이다. 하지만 서울시의회가 박 전 시장의 정책에 제동을 걸었다는 얘기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이는 서울시의회의 의석 쏠림이 심하기 때문이다.

2006년 서울시의회 선거에선 한나라당이 압승했지만 2010년과 2014년엔 민주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이 각각 3분의 2를 넘는 의석을 얻었다. 2018년 선거에선 서울시의회 의석 110석 중 102석을 더불어민주당이 차지했다. 자유한국당은 6석으로 원내 교섭단체(10석 이상)도 구성하지 못했다. 이런 구도에선 지방의회가 단체장을 견제하기 어렵다.

이는 유권자인 서울시민이 선택한 결과이지만 과도한 의석 쏠림은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떤 권력이건 장기화하면 부패할 가능성이 크고, 이는 제도적으로 견제돼야 한다. 지난 총선에서 위성정당 문제로 논란이 됐던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사실 지방의회부터 실험했어야 한다.

2018년 서울시 광역의회 비례대표 득표율을 보면 민주당이 50.2%, 자유한국당 25.2%, 바른미래당 11.5%, 정의당이 9.7%였다. 대략 이런 비율로 서울시의회가 구성됐다면 지금보다는 서울시의회가 시끄럽고 논쟁적일 것이다. 내년 4월 보궐선거가 예정돼 있고, 2022년 6월엔 다시 지방선거를 치른다.

성추문으로 3명의 민주당 소속 광역단체장이 낙마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176석을 가진 거대 여당은 일그러진 지방자치 시스템을 고칠 책임이 있다.

김원배 사회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