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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피해자의 ‘잘린 혀’는 강요된 침묵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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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경서 번역가 겸 문학평론가

박경서 번역가 겸 문학평론가

국내 최초의 성희롱 사건 변론을 맡아 승소했고, 성폭력 피해자를 많이 변호해온 인권변호사 출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혐의와 갑작스러운 죽음은 충격적이다. ‘민선 최초 3선 서울시장’의 영광과 권위가 하루아침에 뿌리째 뽑혀나갈 위기 속에서 그는 정신적 블랙아웃 상태에 놓였을 것이다.

성추행 의혹 흐지부지해선 안 돼 #권력자들 지금 자신을 돌아봐야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1858~1917)은 『자살론』에서 자살의 원인을 이기주의적 자살, 이타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 숙명론적 자살 등 4가지로 구분했다. 여기서 이기주의적 자살은 개인 문제로 인한 극단적 선택을 뜻한다.

이기주의적 자살에도 애도를 표현할 수 있겠지만, 사회적으로 권장되거나 용인될 수 없다. 일시적 고통을 피해 ‘영원한 해결책’을 찾는 ‘비합리성의 합리화 아이러니’가 가슴을 찌른다.

사건 초기 집권 여당 의원들은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박 전 시장에 대해 이런저런 애도 발언을 쏟아냈다. 이는 박 전 시장의 성추행 혐의를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되받아 써서 뒤집어 다시 읽으려는 계산으로 읽힐 소지가 있다.

박 전 시장의 죽음을 영웅시하거나 미화해 그의 성추행 문제를 흐지부지 덮어버리려 하는 뒤집어 읽기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경계해야 한다. 성추행 피해 여성은 마치 혀가 잘려 말을 못하는, 강요된 침묵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왔을 것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작가 존 맥스웰 쿳시가 탈식민주의 문학의 ‘되받아 쓰기’ 기법을 통해 1986년에 발표한 『포(Foe)』라는 소설이 있다. 영국의 작가 대니얼 디포(1660~1731)의 『로빈슨 크루소』를 완전히 뒤집어 놓은 작품이다.

모험심 강한 제국주의자 크루소는 어떤 욕망도 없는 나태한 늙은이가 된다. 식민지의 노예가 된 프라이데이는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혀가 잘려나간 침묵의 타자로 등장한다. 제국주의자들이 프라이데이의 혀를 강제로 잘라놓았다.

프라이데이는 제국주의자들이 저지른 만행을 언어로 재현할 수 없다. 그들의 만행은 드러나지 않고 사위어졌다. 피식민주의자인 타자(프라이데이)의 삶과 제국의 역사가 사욕을 위해 프라이데이를 이용하려 공모하는 백인들(수잔과 포)에 의해 다시 쓰일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박 전 시장의 성추행에 대해 민주당과 좌파 진영은 다시 쓰기 전략으로 미투(Me Too) 운동 고발자를 제국주의자들의 만행을 드러낼 수 없는 프라이데이와 같은 존재로 만들어 놓지 않을까 우려한다. 성추행 피해 여성은 혀가 잘린 프라이데이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빠져서도 안 된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가 파시즘에 대항해 살아남은 데 대한 부채의식에 사로잡힌 심리상태를 반영한 시의 제목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살아남은 것이 오히려 죄스러운, 불우한 시대가 낳은 산물이다.

하지만 박 전 시장의 성추행 혐의는 불우한 시대가 낳은 산물이 아니다. 이번 사건이 권력을 무기로 은밀한 성적 즐거움의 지속적인 탐닉이 빚어낸 개인적 죽음이라면 그의 죽음은 살아남은 자에게 슬픔을 안겨주지 않는다.

조선 시대 실천 유학자 남명 조식(1501~1572)은 진보 지식인의 아이콘이다. 그는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과 경의도(敬義刀)라는 칼을 평생 차고 다녔다. 성성자는 몸을 움직일 때마다 방울이 울려 스스로를 경계하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현이었다. 경의도는 한순간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 자기 검열과 자기반성의 상징이었다.

한국의 권력자들은 남명 정신을 절반이라도 따르고 있을까. ‘기후 악당’에다 이제는 ‘미투 악당’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쓸 것인가.

박경서 번역가 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