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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정치화한 건 여권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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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정치에디터

고정애 정치에디터

진영 사고가 어디에 이를 수 있는지 보여준 극강의 사례는 “증거인멸이 아니라 증거보전”이라는 말이다. 요설이다. 13일 밤 또 한 사례가 등장했다. 서울시 행정부시장 출신인 윤준병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보스’였던 박원순 전 시장의 유지(遺旨)가 다음과 같다고 주장했다.

여권, 공적 추모로 박원순 높이 평가 #“죽음으로 미투 처리 전범” 주장까지 #자기편에만 관대한 정국 관리 한계

“미투와 관련된 의혹으로 고소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부끄럽고 이를 사과한다. 더 이상 고소 내용의 진위 공방을 통해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가하지 마라.”

윤 의원은 “박 전 시장이 누구보다도 성인지 감수성이 높은 분”이라며 이런 해석도 덧붙였다. “고인은 죽음으로 당신이 그리던 미투 처리 전범을 몸소 실천했다. 고인의 명예가 더는 훼손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러 번 읽었지만 요해가 어려웠다. 전범이 ‘典範(전범)’이라면 의미한 바가, 미투로 고소되면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피해자의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바람직하다여서다. 14일 다시 의미 분석에 도전하려 했으나 못했다. 아쉽게도 글이 사라졌다.

윤 의원의 주장대로 박 전 시장은 성인지 감수성을 내보이곤 했다. 1990년대 우희정 조교 성희롱 사건에서 승소한 걸 두고 이렇게 기술하곤 했다. “우희정을 기억하라. 그 한 여성이 없었으면 어땠겠는가. 싸움을 이기기 위해 좋은 원고가 있어야 한다. 그분들의 용기와 희생, 결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희망을 심다』)

서소문 포럼 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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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박 변호사와 이 박 전 시장 사이의 격차가 어지럽다. 그는 피해자가 왜 고발하는지, 어떤 난관에 부닥치는지, 가해자에게 어떤 걸 기대하는지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피해자를 더한 어려움에 몰아넣는 선택을 했다. 스스로 주창했던 가치 중 하나를 스스로 저버렸다.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더라도 박 전 시장의 삶 전체가 부인될 일이 아니다. 부인되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지금의 혼란을 만든 건 누구도 아닌 여권 탓이라고 말해야겠다. 야권을 향해 “정쟁화했다”(설훈)고 비난했지만 먼저 ‘공사 구분 없는 신파적 감상, 얕은 지식으로 나열한 터무니없는 요설’(이규항)로 정치화한 때문이다. “공소권 없음” “사자 명예훼손”을 앞세우고 관 주도의 공적 추모(서울특별시장)를 유도했다. “추모 기간엔 추모만 하자”고 압박했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한 예로, 질문자를 ‘최소한 예의도 모르는 XX 자식’이라고 했다. 기자로서 그저 “의혹에 어떻게 대처할 거냐”고 물었을 뿐인데도 소생을 따졌다. 동시에 여권에서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은 앞다퉈 조문하며 박 전 시장은 “맑은 분”이자 “삶을 포기할 정도로 자신에 대해 가혹하고 엄격한 분”이라고 했다.

그래도 논란이 커지자 여권은 공과론을 들고 나왔다. “피해자의 이야기는 중요하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박 시장의 업적 또한 충분히 존중받고 추모할 가치가 있다”고 했다. 더 솔직한 발언도 있었는데 “너무 도덕적으로 살면 사고 나”였다. 과문한 탓인지 늘 옳고 그름에 날카로웠던 민주당이 자기 진영이 아닌 인사에게 공과론을 적용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식민지 20대 청년의 간도특설대 이력을 독립군 탄압으로 규정하며 6·25 전쟁 등에서의 구국의 삶을 부인하는 당이다. 이제 와 21세기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에 의한 4년여 성추행 의혹을 그저 ‘과’로 퉁치려는 게 아닌가.

또 이런 일에 시시비비를 가리기 좋아하던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는 여성가족부의 한동안 침묵도 있다. 다른 진영이었다면 진즉에 목청을 높였을 것이다.

사실 여권의 이런 식 정국 관리법은 낯익다. 이미 조국 국면에서도 가동됐기 때문이다. “조국 정도의 잘잘못은 누구에게나 있다” “조국 아니면 누가 검찰개혁을 하느냐”고 감싸곤 했다. 아니면 아예 못 본 척했다. 상식 대신 진영 사고를 앞세웠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00년대 진보사회 진영 내에서 가부장 문화와 성폭력 문제가 제기됐을 때 입막음 시도도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진영론과 조직보위론이었다.

이번에도 통할까. 어쩌면. 하지만 지배계급이 된 여권의 민낯도 점차 드러나고 있다. 진보적인 메시지를 내나 진보적이지 않고, 민주주의를 외쳤으나 민주적인 건 아니며, 진정성을 내세우고 국가와 민족·시민의 대변자라고 말하지만 자기편에만 진정성이 있고 자기편의 대변자인 얼굴 말이다.

고정애 정치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