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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여성 의원들의 ‘의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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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임장혁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임장혁 정치부 차장·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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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가 성 평등 사회를 앞당기는 데 기여하는 최초의 여성부의장으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도록 ….”

지난달 5일 여성 최초 국회 부의장이 된 김상희(4선) 의원의 취임사 일부다. 여성 부의장의 탄생은 1949년 고(故) 임영신 선생의 제헌의원 당선으로 시작된 제도권 여성정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여전히 OECD 평균(2017년 기준 28.8%)에 못 미친다지만 21대 총선에선 역대 가장 많은 여성 의원이 탄생했다. 현재 전체 19%에 해당하는 57명의 여성 의원 중 절반 정도(28명)가 민주당 소속이다. 그 중엔 4선 2명(김상희·김영주), 3선 6명(남인순·서영교·인재근·전혜숙·진선미·한정애) 등 중진급 의원들이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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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상황 변화를 보면 여성 부의장 탄생은 자연스런 일일 수 있지만 쉽게 이뤄진 일은 아니었다. 민주당 여성 의원들의 조직적 투쟁의 성과였다. 이들은 공천 국면에서 남인순 최고위원을 앞세워 “여성 후보 30% 할당제 준수”를 외쳤고 이를 근거로 공천심사위원회에선 전혜숙·백혜련 의원이 여성 후보 단수 공천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임기 개시 후엔 여성 부의장 탄생을 위해 당 지도부와 박병석 국회의장 후보를 압박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운동계 출신이 주력인 이들이 보여준 화력은 놀랍지만은 않았다. 김 부의장은 여성민우회, 남인순 의원은 한국여성단체연합, 정춘숙 의원은 한국여성의전화 대표 출신이고, 진선미 의원은 문재인 정부의 여성가족부 장관을 지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로 이름이 알려졌던 권인숙 의원은 최근까지 여성학계의 명사였다.

그렇게 열정적이던 이들은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망과 성추행 피해자의 폭로가 이어진 13일까지 말이 없었다. 14일 내내 수위·방법·시기를 두고 갑론을박을 거듭한 끝에 기자회견 없이 “서울시는 진상조사위를 꾸리라”는 취지의 입장문을 내는 것으로 그간 쏟아진 질문에 대한 답을 갈음했다. 비판 여론에 못 견뎌 내린 결정이었다. 지난 4월 오거돈 전 부산시장 성추행 사건, 2018년 불거졌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행 사건 때도 이들은 대체로 침묵했다. 진상조사는 박용진 의원 등 비주류 남성들이 먼저 주장했다.

이들은 침묵함으로써 결국 동지로서 맺은 박 전 시장과의 ‘의리’와 자신들이 이력서에 새겨 넣은 정체성 사이에서 전자를 택한 셈이다. 여성 유권자들은 이들이 ‘여성 인권’을 브랜드 삼아 쌓아 올린 선수(選數)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이들의 침묵에 비하면 오히려 성추행 의혹에 대한 당의 입장을 묻는 기자를 “후레자식”이라고 욕한 이해찬 대표의 심사가 해석하기 쉽다.

임장혁 정치부 차장·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