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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할아버지 조광현 “밥 먹다가도 컴퓨터 앞으로 가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네이버에서 닉네임 ‘녹야’로 활동 중인 조광현 할아버지가 돋보기로 컴퓨터 모니터의 글자를 확대해 보고 있다. 그는 ‘네이버 지식인’에서 16년간 4만 건이 넘는 답글을 달았다. 채혜선 기자

네이버에서 닉네임 ‘녹야’로 활동 중인 조광현 할아버지가 돋보기로 컴퓨터 모니터의 글자를 확대해 보고 있다. 그는 ‘네이버 지식인’에서 16년간 4만 건이 넘는 답글을 달았다. 채혜선 기자

매일 오전 4~5시 눈을 뜨면 책상 위 컴퓨터 전원을 켠다. 들어온 질문에 서툰 ‘독수리 타법’으로 키보드를 두드린다. 시력이 좋지 않아, 모니터의 작은 글씨를 볼 땐 돋보기 두 개를 겹쳐 볼 때도 있다.

2년 만에 돌아온 ‘지식인 수호신’ #시력 안좋아 돋보기 두개 겹쳐 읽어 #“악플·짓궂은 질문도 이젠 면역 됐다”

네이버 ‘지식인’에서 ‘녹야(綠野)’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전직 치과의사 조광현(86) 할아버지의 아침 일상이다. 그는 2004년부터 16년간 4만 건 넘는 답글을 달아 지식인 등급 중 최상위 두 번째인 ‘수호신’ 에 올랐다. 지식인계의 ‘스타’다. 2017년 2월 건강상 이유로 지식인을 떠난다고 했을 땐, 많은 이용자가 안타까워했다. 그로부터 2년 만인 지난해 2월 복귀한 조 할아버지가 최근 입력한 유쾌한 답변을 찾아봤다.

질문: 아버지 재산이 얼만지 모르겠는데, 평소에 명품가방도 선물해주고, 주위 사람들 말로는 아버지 재산이 몇백억원이래요. 이 정도면 아버지 잘 만난 건가요?.
답변: 아버지는 잘 만나고 잘 못 만나고가 없습니다. 그냥 주어진 운명일 뿐입니다.

질문: 할아버지, 제가 요즘 공부도 재미없고 지루한데 조언 좀 해주세요.
답변: 나는 공부가 재미없고 지루한 사람한테는 할 얘기가 없습니다. 내 얘기도 지루할 테니까요.

질문: 엄마가 브래지어 하지 말라는데 어떡하죠?
답변: 엄마 먼저 하나 사드리세요.

조 할아버지는 14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하루에 대답하는 질문 개수는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TV를 보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자신을 찾는 이가 있을까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곤 한다. 스마트폰이 있지만, 컴퓨터로 답변하는 게 편하다. 그는 “나를 지정한 질문엔 다 답해주려고 한다”며 “일반 질문은 하루 20~30개씩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든 질문에 답하진 않는다. 원칙이 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줘야 고마운 걸 느낀다”는 그는 절실함이 느껴지는 질문에만 답한다고 했다.

답을 모르는 질문을 받으면 공부해서 답변한다. “이 나이가 돼도 모르는 건 알고 싶죠. 내 공부하려고 사전도 찾아보고요. 궁금해서 스스로 알아본 건 안 잊어먹어요. 지식은 이렇게 늘려왔습니다. 내가 모르는 걸 알고 있다면 초등학생이어도 은인이죠. 내 선배라고 생각합니다.”

선정적인 질문 등 곤란하게 하는 질문도 있고, 고령이라 컴퓨터 자판을 누르기도 쉽지 않다. 조 할아버지는 “내 이력을 뒷조사했는지 길게 나열하며 묻거나, 긴 답변을 요구할 땐 힘이 든다”며 “악플이나 짓궂은 질문은 이제 면역이 됐다”고 말했다.

서울대 58학번으로 치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33년간 치과의사로 일했다. 치아 관련 질문도 쏟아진다. 조 할아버지는 “서울대는 등록금이 싸서 갔는데, 손재주가 좋아 치과 공부는 적성에 맞았다”며 “의사 시절엔 돈을 많이 못 벌었다”고 말했다. “남의 입으로 돈 버는 게 치과의사인데, 내 입으로는 남을 속이는 직업이기도 하죠. ‘이거 하면 얼마는 간다’ ‘저걸 하면 좋다’처럼…. 그런 말 하는 게 힘들어서 치과의사 시절엔 점심값도 못 벌 때가 많았어요.”

4년 전 아내가 요양원으로 간 이후 혼자 지낸다. 아내가 치매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해도 매일 찾아가 대화하는 게 낙이었지만, 반년 전부터 그 발길을 끊었다. 코로나19로 요양원 면회가 금지돼서다. 이젠 질문자들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조 할아버지는 “보잘것없는 늙은이에게도 팬이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며 웃었다.

채혜선 기자 chae.hyes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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