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오전 4~5시 눈을 뜨면 책상 위 컴퓨터 전원을 켠다. 들어온 질문에 서툰 ‘독수리 타법’으로 키보드를 두드린다. 시력이 좋지 않아, 모니터의 작은 글씨를 볼 땐 돋보기 두 개를 겹쳐 볼 때도 있다.
2년 만에 돌아온 ‘지식인 수호신’ #시력 안좋아 돋보기 두개 겹쳐 읽어 #“악플·짓궂은 질문도 이젠 면역 됐다”
네이버 ‘지식인’에서 ‘녹야(綠野)’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전직 치과의사 조광현(86) 할아버지의 아침 일상이다. 그는 2004년부터 16년간 4만 건 넘는 답글을 달아 지식인 등급 중 최상위 두 번째인 ‘수호신’ 에 올랐다. 지식인계의 ‘스타’다. 2017년 2월 건강상 이유로 지식인을 떠난다고 했을 땐, 많은 이용자가 안타까워했다. 그로부터 2년 만인 지난해 2월 복귀한 조 할아버지가 최근 입력한 유쾌한 답변을 찾아봤다.
질문: 아버지 재산이 얼만지 모르겠는데, 평소에 명품가방도 선물해주고, 주위 사람들 말로는 아버지 재산이 몇백억원이래요. 이 정도면 아버지 잘 만난 건가요?.
답변: 아버지는 잘 만나고 잘 못 만나고가 없습니다. 그냥 주어진 운명일 뿐입니다.
질문: 할아버지, 제가 요즘 공부도 재미없고 지루한데 조언 좀 해주세요.
답변: 나는 공부가 재미없고 지루한 사람한테는 할 얘기가 없습니다. 내 얘기도 지루할 테니까요.
질문: 엄마가 브래지어 하지 말라는데 어떡하죠?
답변: 엄마 먼저 하나 사드리세요.
조 할아버지는 14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하루에 대답하는 질문 개수는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TV를 보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자신을 찾는 이가 있을까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곤 한다. 스마트폰이 있지만, 컴퓨터로 답변하는 게 편하다. 그는 “나를 지정한 질문엔 다 답해주려고 한다”며 “일반 질문은 하루 20~30개씩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든 질문에 답하진 않는다. 원칙이 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줘야 고마운 걸 느낀다”는 그는 절실함이 느껴지는 질문에만 답한다고 했다.
답을 모르는 질문을 받으면 공부해서 답변한다. “이 나이가 돼도 모르는 건 알고 싶죠. 내 공부하려고 사전도 찾아보고요. 궁금해서 스스로 알아본 건 안 잊어먹어요. 지식은 이렇게 늘려왔습니다. 내가 모르는 걸 알고 있다면 초등학생이어도 은인이죠. 내 선배라고 생각합니다.”
선정적인 질문 등 곤란하게 하는 질문도 있고, 고령이라 컴퓨터 자판을 누르기도 쉽지 않다. 조 할아버지는 “내 이력을 뒷조사했는지 길게 나열하며 묻거나, 긴 답변을 요구할 땐 힘이 든다”며 “악플이나 짓궂은 질문은 이제 면역이 됐다”고 말했다.
서울대 58학번으로 치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33년간 치과의사로 일했다. 치아 관련 질문도 쏟아진다. 조 할아버지는 “서울대는 등록금이 싸서 갔는데, 손재주가 좋아 치과 공부는 적성에 맞았다”며 “의사 시절엔 돈을 많이 못 벌었다”고 말했다. “남의 입으로 돈 버는 게 치과의사인데, 내 입으로는 남을 속이는 직업이기도 하죠. ‘이거 하면 얼마는 간다’ ‘저걸 하면 좋다’처럼…. 그런 말 하는 게 힘들어서 치과의사 시절엔 점심값도 못 벌 때가 많았어요.”
4년 전 아내가 요양원으로 간 이후 혼자 지낸다. 아내가 치매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해도 매일 찾아가 대화하는 게 낙이었지만, 반년 전부터 그 발길을 끊었다. 코로나19로 요양원 면회가 금지돼서다. 이젠 질문자들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조 할아버지는 “보잘것없는 늙은이에게도 팬이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며 웃었다.
채혜선 기자 chae.hyese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