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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4년 지난 지금?"…'미투' 피해자 침묵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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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돈 전 부산시장과 박원순 전 서울시장, 안희정 전 충남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과 박원순 전 서울시장, 안희정 전 충남지사.

“안희정 전 충남지사ㆍ오거돈 전 부산시장ㆍ박원순 전 서울시장 모두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고소인이 신고를 머뭇거리는 건 당연한 구조인데 이를 두고 ‘왜 곧바로 신고를 안 했냐, 뛰쳐나오지 않았느냐’는 건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전직 비서 A씨를 향해 악의적인 댓글이 쏟아지자 서혜진 변호사(더라이트하우스 법률사무소)가 14일 한 말이다. 고소인 측이 기자회견을 열고 성추행 피해 사실을 털어놓자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4년 동안 가만히 있다가 왜 지금에 와서…’ ‘암묵적으로 동의 한 거 아니냐’는 등의 2차 가해가 이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하지만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이뤄졌을 때 대다수의 피해자는 제대로 저항하지도, 주변에 피해 사실을 알릴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한다고 지적한다. 위력이란 상대의 의사를 제압할 수 있는 유ㆍ무형적 힘을 말하며 여기엔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피해자를 압박하는 것도 포함된다.

인사상 불이익에 대한 공포

13일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교육관에서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뉴스1

13일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교육관에서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뉴스1

성폭력 피해자가 느끼는 가장 큰 심리적 압박 요인 중 하나는 인사상 불이익에 대한 공포다. 서 변호사는 “권력형 성폭력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신분이 안정적인 공무원이라고 해도 사건이 드러났을 경우 안정적으로 회사에 다니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장미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역시 “업무 배치의 불이익 등은 권력상 우위에 놓인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돌아갈 확률이 높다. 설령 업무 배치가 분리된다고 해도 같은 직장 내에 있다 보니 ‘피해자도 좋아서 한 거 아니냐’ ‘별것도 아닌데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식의 피해자 책임 유발론을 언급하며 2차 가해를 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말하지 말고 네가 참아라” 주변의 방관

(부산=뉴스1) 여주연 기자 = 9일 오후 부산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오거돈 전 부산시장 엄벌 및 2차 가해 중단 촉구 기자회견에서 오거돈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0.6.9/뉴스1

(부산=뉴스1) 여주연 기자 = 9일 오후 부산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오거돈 전 부산시장 엄벌 및 2차 가해 중단 촉구 기자회견에서 오거돈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0.6.9/뉴스1

주변의 방관적인 태도 역시 피해자가 침묵을 유지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실제 13일 기자회견에서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A씨가 서울시 내부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주위서 '시장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 서울시장이 갖는 엄청난 위력 속에서 어떤 거부나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김경숙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상임대표는 “조직 안에서 발생하는 권력형 성폭력은 더 위계적인 부분이 있다. 권력자 주변에 있는 이들도 ‘왜 지금 말을 하냐 네가 참으면 되지’라는 식으로 침묵할 것을 강요하기 때문에 피해자가 함부로 고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고 했다.

권력자가 수사에 영향 미칠까도 두려워

중앙포토 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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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전문가들은 가해자가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경우 재판 과정에서 그 위력이 행사될까 두려워 침묵하는 이들도 있다고 지적했다. 서 변호사는 “안희정 전 지사나 오거돈 전 시장, 박원순 전 서울시장 모두 지자체장이라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그런 것들이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했다.

김경숙 상임대표는 “피해자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성폭력을 당하기 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가해자가 아무리 진정한 사과를 하고 주변의 어떤 노력이 이어져도 폭력을 당하기 전의 일상생활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결국 권력형 성폭력을 막는 것이 중요한데 피해자가 노(NO)를 외칠 때 이를 노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우림 기자 yi.wool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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