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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기찬의 인프라

한국에도 세계가 놀란 노사정 대타협 있었다…쇼는 이제 그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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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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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독일은 하르츠 개혁, 네덜란드는 바세나르 협약을 통해 저성장과 고실업의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 재도약과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기반을 다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 말이다. 2018년 11월 22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출범식에서다.

9·15대타협은 선진국도 벤치마킹 #정권 바뀌면 타협 정신마저 윤색 #노사정 타협, 정치 이벤트로 전락 #미래 세대 짐 덜어주는 개혁 필요

하르츠 개혁은 2003년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 시절 시작한 노동시장 대수술이다. 노조의 반대에도 규제 완화와 과도한 복지 삭감을 단행했다. 바세나르협약은 1982년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는 대신 정부는 사회 안전망 확충으로 생활 안전성을 확대하는 내용이다. 이 개혁 조치로 두 자릿수에 육박하던 실업률이 떨어지고, 경제성장률은 확 올랐다. 공교롭게 당시 두 나라는 유럽의 병자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개혁 뒤 세계가 부러워하는 국가가 됐다.

1일 노사정 합의에 반대하는 민주노총 조합원이 김명환 위원장을 막고 있다. [연합뉴스]

1일 노사정 합의에 반대하는 민주노총 조합원이 김명환 위원장을 막고 있다. [연합뉴스]

지금도 개혁의 약효는 지속되고 있다. 독일 일간지 더 벨트(WELT)지는 “7월 2일 현재 독일 노동시장에서는 실업률이 증가하긴 했으나 실업자가 여전히 300만명 미만이고, 특히 코로나19 위기 기간인 4~6월 근로자 수가 40만명 늘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코로나19 위기 속 독일의 작은 노동시장 기적”이라고 평가했다. 17년 전에 맞은 하르츠 개혁이란 백신이 위기 상황에서 독일을 병석에 눕지 않도록 지탱하고 있다는 얘기다. 돈을 풀어도 경제와 사회를 떠받치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어야 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입증한 셈이기도 하다. 노동시장 개혁은 단순한 정치적 이벤트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국가 대계라는 사실도 확인시켜 준다.

일각에선 ‘우리는 왜 이런 노사정 대타협이 없냐’고 한탄하기도 한다. 문 대통령조차 하르츠 개혁과 바세나르 협약을 거론하며 사회적 대타협을 독촉했으니 오죽하랴.

한데 한국에도 이에 버금가는 노사정 대타협이 있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이던 2015년 9월 15일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이 그것이다. 비로니크 티머하위스(Weronique Timmerhuis) 네덜란드 노사정위원회(SER) 사무총장은 당시 “한국의 대타협은 매우 체계적이고 종합적”이라며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에 놀랐는데, 이번 대타협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랐다”고 평가했다. 스페인 경제사회위원회 관계자는 “회원국이 모두 공유해야 할 매우 중요한 모범사례”라고 국제노동기구(ILO) 회의에서 제안했다. 실제로 그리스 등 상당수 국가가 벤치마킹했다.

정세균 국무총리가 노사정 협약식이 무산된 뒤 심각한 얼굴로 공관을 나오고 있다. [뉴시스]

정세균 국무총리가 노사정 협약식이 무산된 뒤 심각한 얼굴로 공관을 나오고 있다. [뉴시스]

9·15 노사정 대타협은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오늘의 개혁’이란 모토를 달았다. 하르츠 개혁이나 바세나르 협약처럼 미래 한국의 번영을 위해 노사정이 뜻을 같이했다는 의미다.

협상 기간만 360일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도중에 노동계의 총파업도 있었고, 경영계의 반발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 모든 불만을 배려로, 양보로 극복했다. 그렇게 합의한 항목만 104개 항이다. 내용도 구체적이다. ‘근로시간을 기업 규모별로 단계적으로 주52시간으로 줄인다, 보완책으로 탄력근로제를 확대한다. 최저임금은 지역·업종별 개선방안을 마련한다. 비정규직 남용을 억제하고 보호를 강화한다. 임금체계는 직무와 숙련을 기준으로 개편한다’ 등이다.

이 합의문은 문재인 정권이 바뀌면서 적폐의 부산물로 전락했다. 다만 근로시간 단축,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같은 노동계가 타협 과정에서 요구했던 내용만 쏙 빼서 ‘노동존중’이란 이름으로 추진했다. 부작용이 생기자 부랴부랴 탄력근로제 확대와 같은 후속 조치를 정부가 마련했다. 9·15 노사정 대타협문 대로만 추진했어도 생기지 않을 부작용이었다. 노무현 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역임한 김대환 9·15 대타협 당시 노사정위원장은 “합의문이 제대로 추진됐다면 코로나19로 위기에 몰린 경제와 사회에 큰 힘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5·2020 노사정 대타협의 차이. 그래픽=신재민 기자

2015·2020 노사정 대타협의 차이. 그래픽=신재민 기자

얼마 전 코로나19 위기 타개를 위한 노사정 대타협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논의 한 달여 만에 속전속결로 처리하려 했다. 그래서인지 내용도 별것 없었다. 합의문안을 본 어느 학자는 “타협한 게 뭐지”라며 의아해했다. ‘소비 분위기 확산에 적극 동참한다.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적극 지원한다. 노사 협력 분위기가 확산되도록 노력한다’처럼 뜬구름 잡는 듯한 내용이 대부분이어서다. 그나마 고용유지지원금 지원 기간 연장과 같은 구체적인 항목은 정부가 추진하던 특별대책을 끼워 넣은 것에 불과했다. 합의가 무산되면서 정부만 크게 망신을 당했다. 이 대화를 하자고 제안했던 민주노총이 막판에 틀었기 때문이다. 법적 기구인 경사노위는 외곽조직으로 추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김대환 전 장관은 “대타협이라고 할만한 내용도 없는데, 정권 차원의 이벤트로 (노사정 대타협을)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역사적으로 사회적 대타협은 국가의 경제 사회적 대전환을 이끌어냈다“고 했다. 한데 그 대타협(9·15 노사정 대타협)을 현 정부가 휴짓조각으로 만들었다. 역설적으로 경제 사회적 대전환의 토대를 걷어찬 셈이다. 그러고는 대타협을 추진한다고 법석이었다. 이벤트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이유다. 지금이라도 내 정권, 네 정권 따지지 말고 9·15 노사정 대타협 정신부터 되짚으면 이벤트 수고 정도는 덜지 않을까. 후손에게 빚을 지우지 않는 길이기도 하다. 안 그래도 청년과 미래세대에 떠넘긴 빚이 너무 많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