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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사법절차 종료해도 실체적 진실은 밝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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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전직 비서 측이 기자회견을 통해 입장을 밝혔다. 어제 박 시장 영결식 직후다. 고소인 일방의 주장이긴 하지만 내용이 충격적이다. 박 시장 비서로 근무한 4년간, 그리고 부서를 옮긴 이후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음란 문자·사진을 받았고, 시장 집무실 내 침실에서 신체 접촉이 있었다고 폭로했다. 시청 내부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묵살당했다고도 했다. 고소인 측은 전형적인 위력에 의한 성추행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증거로 제출한 일부 텔레그램 캡처도 공개했다.

박원순 고소 피해자 2차 가해 멈추고 #재발 막기 위해 진실 반드시 규명해야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피해자의 편지를 대신 읽었다. “법치국가 대한민국에서 법의 심판을 받고 인간적인 사과를 받고 싶었다. 용기를 내 고소장을 접수시키고 밤새워 조사를 받은 날, 저의 존엄성을 해쳤던 분께서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 내려놓았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저와 제 가족의 고통이 일상과 안전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성추행 피해에 더해 아마도 박 시장의 죽음이라는 끔찍한 트라우마와 함께 살아가야 할 피해자의 고통이 느껴졌다.

최근 인터넷 공간 등에서는 박 시장 지지자를 중심으로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도를 넘고 있다. 신상을 털고, 엉뚱한 여성을 고소인으로 지목한 사진이 돌아다니는가 하면, 고소인이 죄 없는 박 시장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니 응징하자는 비이성적 주장을 펴고 있다. 가해자는 간데없고, 엉뚱하게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하는 형국이다. 성추행 의혹이 제기된 박 시장 영결식을 서울특별시 기관장으로 치르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여론에 대해서도 “이순신이 관노랑 잠자리를 가졌다고 해서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말인가”라는 막말이 진보 커뮤니티에 퍼졌다. 박 시장의 조문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정의당 류호정·장혜영 두 여성 의원에게도 맹비난이 쏟아졌다. 이런 발언을 방조하거나 은근히 불붙이는 듯한 여권·진보 인사들의 태도도 큰 문제다.

물론 진실은 따져봐야 하는 문제다. 그러나 그 실체적 진실을 따질 기회를 스스로 저버린 사람이 박 시장 본인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워낙 맑은 분이어서” “모든 여성이 그만한 ‘남사친’(남자사람친구)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일방적으로 감싸는 일은 사안을 호도하고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서울특별시 기관장으로 대대적으로 치르는 장례 자체가 2차 가해일 수 있음은 물론이다.

박 시장의 사망으로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료됐다. 그러나 사법적 절차와 무관하게 가부간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려는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 피해자 측은 이미 2차 가해와 관련해 추가 고소장을 제출한 상태다. 안 그래도 여권 지자체장의 권력형 성폭력 사건이 줄을 잇는 가운데 어렵게 용기를 낸 피해자의 목소리가 묻혀서는 안 된다. 더 이상 이런 일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