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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때리는 트럼프에 중국이 '4년 더' 외치는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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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박현영 기자 중앙일보 경제에디터

“쿵플루(kung flu). 네, 맞아요. 쿵플루예요.”
지난달 선거 유세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이렇게 불렀다. 중국 무술 쿵후와 독감(flu·플루)을 합친 말이다. 코로나19가 중국 책임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만들었다. 중국을 조롱하는 신조어에 트럼프 지지자들은 환호했지만, 중국의 심기는 편치 않다.

[박현영의 워싱턴 살롱] #홍콩·인권 등 중국 민감 사안에 무관심 #미국산 많이 사주면 '거래 가능한 사람' #한·일·EU 등 동맹 약화는 중국에 이득

‘중국 때리기’ 전략으로 집권한 트럼프 대통령은 임기 내내 중국을 몰아세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중국이 미국의 일자리를 빼앗고 경제적으로 착취하고 있다는 주장을 펴 중서부 '팜 벨트' 농부들과 낙후된 공업지대인 '러스트벨트' 노동자 지지를 얻어 당선됐다.

취임한 뒤에는 중국을 상대로 무역전쟁을 벌였다. 대규모 중국산 제품에 고율 관세를 매기자 중국 경제도 휘청했다. 지난해 중국 국내총생산(GDP)은 6.1% 성장에 그쳐 29년 만에 가장 낮은 성적을 냈다. 미국도 동시에 타격을 입는 대혈투가 됐지만, 지금까지 어느 대통령도 이렇게 중국을 손본 적은 없었다는 게 트럼프가 내세우는 자랑거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무역, 코로나19 문제 등과 관련해 중국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있지만 정작 중국은 트럼프의 재선을 원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사진은 지난해 6월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당시 회동한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무역, 코로나19 문제 등과 관련해 중국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있지만 정작 중국은 트럼프의 재선을 원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사진은 지난해 6월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당시 회동한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연합뉴스]

중국과 거침없이 싸우는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은 불편하지 않을까. 내심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하고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기를 바라지 않을까.

중국이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어느 후보를 선호하는지는 알 수 없다. 내부적으로 의견이 일치하는 지도 불분명하다. 다만, 최근 워싱턴과 베이징의 전문가들은 중국이 오히려 트럼프 대통령 재선을 원하고 있다는 분석에 무게를 싣고 있다.

중국 입장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쉬운 상대'라는 게 가장 큰 이유다. 트럼프는 '거래 가능한 사람'이라는 게 중국의 평가다. 그의 관심사는 중국이 농산물과 에너지 등 미국산 상품을 얼마나 사는지에 집중돼 있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이 관심 가진 홍콩과 대만 문제 등 정치·인권·지정학적 문제에는 상대적으로 무심하다. 트럼프는 중국의 홍콩 국가보안법 제정, 신장자치구 위구르족 인권 탄압 등 중국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주제에 대해 개인적 의견을 내지 않는다.

트럼프 이후 미중 관계 4년.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트럼프 이후 미중 관계 4년.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중국 입장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무지하고 변덕스럽고 성가시지만, 쓰임새가 없진 않다”고 분석했다. 중국을 이데올로기가 다른 적으로만 보지 않고 가격이 맞으면 얼마든지 거래할 수 있는 상대로 보는 게 그의 쓰임새라는 평가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최근 저서 『그 일이 일어난 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났을 때 위구르족 집단 수용시설 건설에 대해 문제 제기는커녕 “정확하게 옳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호응했다고 썼다. 물론 트럼프 측은 발언을 부인하고 있다.

트럼프는 최근 위구르족을 탄압하는 중국 관료에 대해 제재를 부과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주제를 묵살하고 있다. 트럼프는 최근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 인터뷰에서 중국과의 무역합의를 달성하기 위해 제재 법안 처리를 미뤘다고 인정했다. 반면 바이든 후보는 공개적으로 홍콩과 신장 문제에 대해 중국을 강하게 비판해 왔다.

중국 고위 관리를 지낸 룽융투 전 대외무역경제합작부 부부장은 지난해 11월 광둥성 선전에서 열린 콘퍼런스에서 “우리는 트럼프가 재선되는 것을 원한다”고 말했다. 정치가 아닌 물질적 이익만을 추구하며, 트위터만 확인하면 속내를 읽을 수 있는 쉬운 상대라고 평가했다.

중국 정부의 입 역할을 하는 후시진 글로벌타임스 편집장은 지난 5월 트럼프에게 보내는 공개 트윗에서 “우리는 당신의 재선을 바란다. 세계가 미국을 혐오하게 하고, 중국 내 단결을 촉진하기 때문”이라고 썼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AFP=연합뉴스]

동맹보다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우는 트럼프 재집권이 장기적으로 중국에 이익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저우샤오밍 전 제네바 유엔본부 주재 중국 부대표는 블룸버그통신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관계를 파괴하고 있지만 바이든은 동맹과 연대해 중국을 표적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바이든 당선이 중국에는 더 위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바이든은 중국을 고립시키고 맞서기 위한 국가 간 연합체를 구성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바이든은 “민주 국가들과 함께할 때 우리 힘은 두 배 이상이 된다. 중국은 세계 경제의 절반 이상을 무시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유지에 관심이 없고, 세계보건기구(WHO) 탈퇴 절차를 진행 중이다. 영국ㆍ캐나다ㆍ프랑스ㆍ독일 등과의 관계도 삐걱대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이 전ㆍ현직 중국 관료 9명을 인터뷰한 결과 미국이 전통적인 동맹과 힘을 합칠 경우 중국에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은 트럼프 외교정책이 일방적이고, 개인 차원을 강조하고, 금전적 거래에 집착함에 따라 전통적인 동맹 체제를 약화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미 시사주간지애틀랜틱은 “트럼프는 아시아에 대해 무역 문제와 북한 김정은과 시간 낭비하는 것 외에는 가끔 호기심을 갖는 정도”의 관심밖에 없다면서 “트럼프가 미군 주둔 비용과 무역 문제로 가장 가까운 동맹인 한국·일본과 긴장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 베이징은 주목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런 가운데 정작 트럼프 대통령이 시 주석에게 재선 지원을 노골적으로 요청했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볼턴 전 보좌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오사카에서 시 주석과 대화 중 화제를 돌려 미국산 농산물을 대량 구매해 대선에서 이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고 주장했다.

“포 모어 이어스(Four more years).” 지지자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을 주문하며 외치는 구호다. 이젠 중국이 이 구호를 속으로 조용히 외치고 있다는 게 워싱턴과 베이징의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