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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용사 늘 챙긴 호국 상징…백 장군 이젠 부하들 곁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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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상

김희상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별세 소식을 듣고 한국과 미국 모두에서 애도가 이어졌다. 2008년 6월부터 2011년 7월까지 3년1개월간 주한미군사령관을 지낸 월터 샤프 예비역 육군 대장은 중앙일보에 고인을 추모하는 기고문을 e메일로 보내왔다. 노무현 정부에서 국방보좌관을 역임했던 육군 중장 출신의 김희상 한국안보문제연구소 이사장도 추모의 글을 보내왔다. 샤프 전 사령관은 고인을 “역사 속 거인”으로, 김 이사장은 고인을 “호국의 영웅”으로 기렸다.

김희상 예비역 중장 추모글 #풍전등화 신생 대한민국 굳게 다져 #공직 떠나서도 군과 안보 위해 최선

언론마다 ‘전쟁 영웅’이라는 찬사로 우리 백선엽 장군님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3년여 한국전쟁(6·25 전쟁) 중 대한민국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 낸 결정적 전투의 하나가 1950년 8월 다부동 방어 전투이고, 우리가 통일을 내다보며 쾌속 북진했던 가장 장쾌한 공격 작전은 1950년 10월 1사단의 평양 선두 입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두 결전의 승리를 백 장군님이 이끄셨으니 그것만으로도 당연히 그런 찬사는 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백 장군님의 대한민국에 대한 그 많은 공헌과 큰 인물됨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전쟁 영웅’이라는 한마디로는 미흡합니다. 예컨대 전쟁 중에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을 동맹으로 끌어들이고, 국군을 확충해 풍전등화의 신생 대한민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데도 육군참모총장 백 장군님의 뒷받침이 절대 적지 않았습니다. 백 장군님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직접 설득해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끌어낸 것이나, 반공포로 석방과 같은 한·미 간 큰 갈등을 해결해 동맹으로 이었습니다.

1950년 10월 평양에서 백선엽 제1사단장(왼쪽)이 대동강변에서 미 육군 제1기갑사단장과 작전을 협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1950년 10월 평양에서 백선엽 제1사단장(왼쪽)이 대동강변에서 미 육군 제1기갑사단장과 작전을 협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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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군 강화엔 더욱더 그랬습니다. 1954년 2월 우리 군이 동양 최초의 야전군인 제1야전군을 창설하자 참모총장이던 백 장군님이 그 초대 사령관으로 내려가 틀을 세우지 않았습니까? 결국 우리가 6·25 위기를 극복하고, 지난 1000여 년 이어지던 중국의 핍박에서 벗어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으로 번영하는 데 백 장군님의 헌신도 컸습니다. 더욱이 백 장군님은 모든 공직에서 떠난 뒤에도 항상 군과 안보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호국 국군’의 상징이 됐습니다.

100세를 눈앞에 둔 작년 11월 14일 4명의 역대 연합사령관들이 찾아뵙고 눈물을 글썽이며 “백 장군님은 우리 모두의 영웅”이라며 “동맹 포에버!”를 외친 감동적 장면은 상징적이었습니다.

작년 11월 22일 그 불편한 몸으로도 현충원 무명용사 묘역을 찾았던 백 장군님이 아니십니까? 그래서 다부동에서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라고 했습니다. 앞장을 섰을 때는 다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평양 진격 때는 지원 미군들까지 한목소리로 ‘평양, 평양’을 외쳤습니다.

돌이켜 보면 어느 것 하나 소중하고 존경스럽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백 장군님은 앞으로도 호국의 위인이자 영웅으로 남으실 것입니다. 존경하는 백 장군님의 영전에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깊은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김희상 예비역 육군 중장·한국안보문제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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