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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6·25 전쟁 영웅 하늘나라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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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4호 10면

생전에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는 백선엽 장군의 모습. 권혁재 기자

생전에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는 백선엽 장군의 모습. 권혁재 기자

“이제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 여기서 밀리면 바다에 빠져야 한다. 우리가 밀리면 미군도 철수한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끝이다. 사단장인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두려움에 밀려 물러서면 나를 쏴라.”

백선엽 예비역 대장 별세 #1950년 낙동강 전선 다부동전투서 #권총 들고 앞장 서 적진 돌격 #부산교두보 지켜 역전의 전기 마련 #공산주의 침략 막고 평양 첫 입성 #미군과 함께 지휘, 한미동맹 상징 #창군 주역…전후엔 전력확충 앞장 #전역 뒤 외교관 활동, 교통부장관도 #기업인으로 화학공업 육성도 주도 #대한민국 가치, 국방 중요성 강조 # # #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10일 오후 11시 서울대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100세. 백선엽 예비역 대장은 6·25전쟁 초기인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의 고지에서 후퇴하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외친 뒤 권총을 빼 들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러자 부하들도 일제히 그를 따랐다. 당시 국군 1사단장(준장)이던 그는 국군 역사상 적진으로 직접 돌격한 유일한 장군이 됐다. 국군과 유엔군은 8월 3일~29일 경상북도 칠곡군 다부동에서 이렇게 적의 예봉을 꺾었고 이어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었다. 대한민국이 공산주의의 야욕을 꺾은 순간이다.

1사단은 그해 10월 18일 평양에 처음 입성했으며 그 달 말에는 평안북도 영변·운산에서 진격 속도를 조절해 매복한 중공군의 기습을 피할 수 있었다. 1사단은 전력을 유지한 채 물러나 계속 싸울 수 있었다.

백 장군은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 극동연합군 최고사령관, 이하 6·25전쟁 때 직함)를 비롯한 미군 최고 지휘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다. 월턴 워커(1889~1950, 주한 미8군 사령관), 매슈 리지웨이(1895~1993, 극동연합군 최고사령관), 프랭크 밀번(1892~1962, 1군단장), 제임스 밴 플리트(1892~1992, 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1901~87, 8군 사령관) 등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전쟁 영웅이다. 그는 이들의 전술과 리더십, 그리고 군대 운용체계를 국군을 강군으로 키우는 자양분으로 흡수했다.

최근까지 주한미군 지휘부가 한국에 부임할 때마다 백 장군을 관례적으로 예방해온 이유다. 이들은 전쟁사에 나오는 선배 군인들의 생생한 일화를 백 장군으로부터 들었다. 미군은 평택기지에 ‘백선엽 홀’도 만들었다. 백 장군은 자연스럽게 한미동맹을 상징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굳게 다문 입과 날카로운 눈매의 그는 평소 “나 자신을 연마하고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 군인의 길”이라고 강조해왔다.

백 장군은 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2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 인엽(1923~2013년·60년 육군 중장 예편·선인학원 설립자)씨가 태어난 2년여 뒤 부친이 별세하자 모친은 평양으로 이주했다. 백 장군은 약송소학교를 거쳐 39년 평양사범학교를 마쳤다. 그 뒤 교사생활을 하다 이듬해 만주국(31~45년 존재했던 일제의 종속국가)의 군 간부 양성소인 중앙육군훈련처(펑톈(奉天)군관학교)에 들어갔다. 41년 12월 9기로 마치고 견습 사관을 거쳐 소위로 임관했다. 43년 주로 조선인으로 이뤄진 간도특설대에 배치돼 근무하다 해방을 맞았다.

45년 광복을 맞자 평양에서 당시 평안남도 인민 정치위원회를 이끌던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일했다. 그해 9월 소련군을 따라 귀국한 김일성이 10월 10일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조직하자 조 선생의 권유에 따라 12월 서울로 월남했다.

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국방경비대 부위(중위)로 임관한 뒤 창군 작업에 나섰다. 5연대 A중대장과 1대대장을 거쳐 47년 연대장을 맡았다. 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 뒤 군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숙군(肅軍) 작업을 지휘하다 남조선노동당 조직책으로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은 박정희 전 대통령(17~79년, 재임 62~79년, 당시 소령)의 사면에 기여했다.

 한국전쟁 격전지 다부동 전투에서 백선엽 사단장이 참모들과 회의를 하고 있다.

한국전쟁 격전지 다부동 전투에서 백선엽 사단장이 참모들과 회의를 하고 있다.

49년 7월 광주 주둔 5사단장을 거쳐 50년 4월 서부전선 최전방을 담당하는 1사단장을 맡은 것은 운명이었다. 경기도 시흥의 육군보병학교에서 ‘고급간부 훈련’을 받기 위해 출근하려던 순간 개전 소식을 듣고 곧바로 사단 사령부로 복귀했다. 1128일에 걸친 6·25전쟁의 시작이었다. 개전 당일 서울 신당동 집에서 헤어진 모친과 부인, 그리고 세 살 된 딸과는 51년 4월 2군단장에 임명돼 이승만 대통령에게 신고하려고 부산의 임시 경무대를 방문했을 때 비로소 만났다.

만 32세이던 52년 7월 육군참모총장에 올라 훈련·보급 체계를 개혁과 상이군경 복지 향상, 군사유학 강화 등으로 군현대화를 이끌었다. 53년 1월 국군의 첫 대장에 올랐다. 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조인식에 한국대표단으로 참석하고 53년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도 기여했다. 6·25전쟁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셈이다.

57년 5월 육군참모총장으로 복귀하고 59년 연합참모본부 의장을 맡아 무기체계 현대화에 주력했다. 국군이 세계적 강군이 된 기틀을 닦았다.

60년 5월 전역하고 그해 7월 주중화민국(현재 대만) 대사를 시작으로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61년 7월 주프랑스·네덜란드·벨기에 대사를 맡았다. 65년 캐나다 대사로 옮겼다. 69년 10월 교통부 장관에 올라 서울 지하철 1기 건설의 기초를 마련했다. 71~80년 공기업인 충주·호남비료 사장과 이를 합병한 한국종합화학 사장을 지내며 화학공업 발전의 기반을 닦았다.

그 뒤 6·25전쟁 기념사업과 회고록 집필, 강연 등 젊은 세대에게 대한민국의 가치와 국방의 중요성을 알리는 활동을 펼쳐왔다. 광복으로 되찾은 조국을 지키기 위한 치열한 삶이었다.

유족으로 부인 노인숙씨와 아들 남혁·남흥씨, 딸 남희·남순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오는 15일 오전 7시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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