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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적 진실에 접근하려면…‘오디세우스의 흉터’가 열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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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4호 27면

미래 Big Questions 〈17〉 가짜·진짜의 차이 

집을 나서는 순간 문 앞에 그림 한장을 발견했다고 상상해보자. 왠지 궁금해 자세히 바라본 그림은 다빈치의 ‘모나리자’였다. 하지만 잠깐! 우연히 집 앞에서 발견된 모나리자가 이 세상 단 하나뿐인 오리지널일 리 없지 않은가? 지금 이 순간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있을 원작의 복사판을 들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되면서도 진짜같이 보이는 그림. 모든 것이 오리지널과 동일한 그림이 오리지널이 아닌 이유는 단순히 확률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오리지널과 복제, 원본과 가짜의 차이는 결국 통계학적인 차이인 걸까?

감쪽같은 다빈치 ‘모나리자’ 그림 #16세기 시공간 완벽한 반복 못 해 #『미메시스』 비교문학가 아우어바흐 #“가장 적은 설명이 되레 진실 근접” #햄릿 열연 배우도 그 자체는 아냐 #아우라 재현해도 흉내내기일 뿐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1920년대 독일 인문학 스타였다. 당시 최첨단 미디어였던 라디오 방송을 통해 철학적 사유를 논의했으니 말이다. 대량생산 프로세스를 통해 식별 불가능한 복제품들이 만들어지는 세상을 경험한 벤야민은 질문한다. 만약 비슷한 방법으로 예술작품 역시 복사될 수 있다면? 완벽하게 똑같은 모나리자를 백만 번 찍어낼 수 있다면 오리지널이 여전히 특별하고 가치 있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벤야민 “시공간적 존재=오리지널 아우라”  

러시아 시인 겸 화가인 보리스 그리고리에프의 작품인 ‘프세볼로드 메이어 홀드 초상화’(1916). [러시아 박물관]

러시아 시인 겸 화가인 보리스 그리고리에프의 작품인 ‘프세볼로드 메이어 홀드 초상화’(1916). [러시아 박물관]

시간과 공간은 완벽히 반복될 수 없다. 작품이 창시된 시간과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원작의 원천적 의미 역시 완벽하게 재현될 수 없다는 말이다. 더는 반복될 수도, 복제될 수 없는 작품의 시공간적 존재성이 바로 오리지널의 “아우라”를 정의한다고 벤야민은 주장한다. 그렇다면 걱정된다. 시대와 세상은 언제나 변한다. 어제까지 생생하게 기억나던 일들이 얼마후면 잊히고, 오늘 우리에게 대단한 사건들이 불간 몇 년 후면 아무 의미 없어진다. 그렇다면 예술작품 역시 만들어진 시대와 공간에서 멀어질수록 작품의 아우라는 점차 소멸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16세기 르네상스 이탈리아를 기억하는 자가 아무도 없을 몇백만 년 후 미래. 작품의 아우라가 사라진 먼 미래엔 오리지널이라는 단어 역시 무의미해질 수 있겠다.

비교문학의 창시자인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대표작 『미메시스』의 본래 제목은 『미메시스: 서양문학에서의 현실 표상』이었다. 서양문학의 핵심은 어떻게 현실을 표현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현실은 완벽한 이데아 세상의 왜곡된 복제품일 뿐이라고 주장한 플라톤. 삶 그 자체가 짝퉁이기에, 대부분 인생에서는 그 어느 아우라도 느끼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어차피 이미 복제된 것을 다시 한번 복제한 미메시스를 만들어 내기에, 플라톤에게 예술은 증오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진실과 참을 직접 경험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 하더라도 더 완벽한 미메시스를 통해 참의 세상으로 접근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제임스 조이스

제임스 조이스

아우어바흐는 서로 역설적인 두 가지 미메시스 모델을 제안한다. 우선 “오디세우스의 흉터”를 생각해볼 수 있다. 20년 만에 다시 고향 이타카로 돌아온 오디세우스. 자신을 키운 보모 에우리클레아는 허벅지에 남아있는 흉터를 통해 오디세우스를 알아본다. 그리고 어느덧 호메로스는 우리를 더는 작품에서의 이타카가 아닌 오디세우스의 시공간적 과거로 안내한다. 기억된 사건이 아닌, 수십 년 전 날카로운 멧돼지 이빨에 찔리는 오디세우스의 허벅지를 우리는 직접 호메로스의 시를 통해 다시 한번 볼 수 있다. 마치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주인공 스테판 데달루스가 생각에 빠져 해변을 걷다 어느 한순간 더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생각하는 스테판 데달루스가 아닌, 해변을 걸으며 깊은 사유에 빠진 아리스토텔레스가 되어가듯 말이다.

2700년 전 호메로스는 상상력이 불필요한 섬세한 설명과 디테일을 통해 오디세우스와 에우리클레아의 기억 속 복제로만 남아있던 과거 사건의 아우라를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상상은 언제나 망각의 일부이기에, 독자의 상상력은 오리지널의 아우라를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우라를 볼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아우어바흐는 유대인들의 타나크 (Tanakh, 구약) 창세기 Aqedat Yitzhaq (이쯔하크/이사악의 묶음) 이야기에서 발견한다. 야훼의 명령에 따라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으로 향하는 아브라함.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모리아 산이 어디에 있는지, 언제,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아브라함과 이사악은 산으로 향하는지.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모르면 모를수록, 자세한 설명이 없으면 없을수록 우리는 상상하기 시작한다. 당나귀를 탄 아브라함과 이사악; 고된 노동으로 물집 잡힌 아브라함의 손; 이미 모든 걸 이해하고 있는 듯한 어린 이사악의 얼굴. 그 어떤 설명으로도 야훼와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수천 년 전 그날 아우라는 전달될 수 없기에, 역설적으로 가장 적은 설명이 가장 진실에 근접할 수 있다고 아우어바흐는 제안한다.

오리지널과 가짜의 관계. 연극영화 배우들은 매일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연기하는 배우는 햄릿이 아니다. 극장 바깥에서는 샌들을 신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평범한 21세기 청년이지만, 무대 위에 오르는 순간 그는 중세기 덴마크 왕자 햄릿이 되어야 한다. 배우는 매일 가짜와 오리지널의 경계를 넘나드는 직업이다. 모스크바 예술극장 창립자로 유명한 연출가 콘스탄틴 스타니슬랍프스키(Konstantin Stanislavski)는 무대 위에서 배우는 더 이상 배우가 아닌 극의 인물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가짜인 배우가 오리지널인 인물이 될 수 있을까? 할리우드 배우들을 가르친 리 스트라스버그(Lee Strasberg)는 “메소드 연기”를 제안한다. 단순히 타인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기억에 남은 감정이 극적 인물의 캐릭터에 녹아 들어가야만 진정성 있는 연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햄릿이 아닌 나의 기억이 어떻게 햄릿의 감정을 재현할 수 있을까? 나는 언제나 “만약 내가 햄릿이라면”이라고 추측하는 나 자신뿐이지 않을까?

메이어홀드는 ‘생체역학’ 방법 제안

발터 벤야민(左), 에리히 아우어바흐(右)

발터 벤야민(左), 에리히 아우어바흐(右)

반대로 러시아 국민배우이자 연출가였던 메이어홀드(Vsevolod Meyerhold)는 “생체역학” 방법을 제안한다. 생각은 행동으로 표현되고, 행동은 생각과 감정의 신호일 테니, 인물의 행동을 정확히 모방하고 내재화한다면, 배우 내면에 인물과 동일한 감정과 생각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햄릿의 손, 걸음, 눈동자를 완벽하게 내재화해야만 배우는 햄릿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행동은 결국 시뮬레이션에 불과하지 않을까? 볼셰비키 혁명을 지지하던 메이어홀드는 스탈린 대숙청 때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결국 총살당한다. 감옥에서 메이어홀드는 한탄한다. ‘65세 노인이 바닥에 눕혀진 채 채찍에 맞아 발바닥과 다리는 곪아 터졌다. 곪아 터진 다리에 다시 채찍으로 온종일 맞았기에 나는 개 같이 바닥에 꿈틀거리며 모든 죄를 자백하고 부르는 대로 서명했다.’

우리는 메이어홀드의 고통과 외로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바닥에 드러누워 꿈틀거리며 신음하는 흉내를 내봐야 80년 전 모스크바 NKVD (구소련 비밀경찰) 지하감옥에서 메이어홀드가 경험한 “아우라”를 오늘 우리가 어떻게 재현하고 공감할 수 있겠는가?

디지털 복제 기술, 가상현실, 증강현실, 그리고 유전자 복제. 발터 벤야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최첨단 복제 기술들이 등장한 오늘날 우리는 이제 다시 한번 질문해야 하겠다. 과연 오리지널과 복제, 가짜와 진짜의 진정한 차이는 무엇인지 말이다.

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자 daeshik@kaist.ac.kr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각각 박사후 과정과 연구원을 거쳤다. 미국 미네소타대 조교수,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냈다. 2013~2015년 중앙SUNDAY에 ‘김대식의 Big Questions’를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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