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스페인에서 경찰에 둘러싸여 심문 받은 사연

중앙일보

입력 2020.07.10 13:00

[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46)

죄를 지은 것이 없는데도 가슴은 쿵쾅거렸다. 범죄영화에서 보던 장면처럼 경찰차의 네 개 문을 동시에 열고 뛰어나온 정복 경찰들, 그중 셋이 나를 에워싸고 뚫어져라 바라보며 각기 알 수 없는 스페인어를 쏟아낸 상황이 얼마나 길었을까. 풍성한 눈썹의 경찰이 다른 경찰들의 입을 닫도록 하고 물었다. 또박또박 천천히 스페인어로. 아무리 천천히 말한다고 해도 모르는 스페인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는 일이라 나 역시 같은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요 노 아블로 에스빠뇰(저는 스페인어를 하지 못합니다).”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던 풍성한 눈썹이 알베르게 빌딩을 살피던 무전기 경찰을 불렀다. 그가 뛰어 가까이 왔을 때 무전기에서는 박자를 맞추지 못하는 힙합 뮤지션의 랩처럼 튀는 소리가 연신 쏟아졌다. 무전기 경찰은 영화 ‘마스크 오브 조로’를 찍을 무렵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똑 닮았는데 그가 다가와 내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댔다.

가슴이 더 쿵쾅거렸다. 안토니오(편의상 그를 이렇게 부르자. 무전기 경찰보다는 사람 이름으로 부르는 게 예의가 아니겠나? 게다가 그는 정말 반데라스와 닮았다)와 내가 마주 서자 다른 경찰들은 급히 자리를 비켜주 듯 빌딩 주변으로 미끄러지며 흩어졌다. 안토니오는 오른쪽 눈꺼풀을 0.3초쯤 늦게 감는 방식으로 눈을 깜박이면서 버터가 많이 섞인, 끝이 동글게 말리는 영어로 속삭였다.

“레이디, 다친 데는 없나요?”
“…”
“레이디, 도난 신고하셨죠? 도둑이 아직 저 안에 있다는 거죠?”

순례자 조가비. 순례자들의 상징 조가비를 모아두고 순례의 축복과 응원을 상징한다. [사진 박재희]

순례자 조가비. 순례자들의 상징 조가비를 모아두고 순례의 축복과 응원을 상징한다. [사진 박재희]

엥? 도둑? 신고? 무슨 소리지? 그러다 뿔테안경 청년이 떠올랐다. 그와 나는 각기 영어와 스페인어로만 말하며 불통을 거듭했었다. 결의에 찬 표정으로 전화했었는데 설마? 답답했지만 불평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국 땅끝 마을에 여행 온 외국인이 있다 치자. 그의 영어를 마을 주민이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하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저 통번역 앱이 절실했건만 데이터가 터지지 않아 일어난 해프닝일 뿐이었다. 도둑 같은 건 없었다고 그냥 실수라고, 여권과 순례자 여권, 지갑을 넣은 파우치와 시계를 세면대 옆에 두고 나와서 청년에게 도움을 청했던 거라고. 난 그저 비상연락처를 물었을 뿐이라고.

다행히 안토니오는 내 말을 알아들었다. 뿔테안경을 불러 무슨 확인을 하는구나 했는데 경찰 앞에 선 청년이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으며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로 시엔토.” ‘로 시엔토’는 내가 외워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스페인어 중 하나다. 미안하다는 뜻이었다. 그 청년의 말을 듣는 순간 무언가 내려앉았다. 미안하다니…모두 내 잘못이다. 칠칠치 못하게 물건을 흘리고 나온 것도,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돼먹지 않은 영어로 호들갑을 떤 것도, 자동 잠금시간 이후에 돌아와 놓고 애먼 청년에게 비상상황을 외치며 전화번호를 찾아달라고 한 것도 모두다. 그가 오해하고 도둑맞은 외국 아줌마를 구하려 엉뚱하게 도난 신고를 했지만 잘못은 내게 있다. 뿔테안경 청년이 안도감과 부끄러움, 난감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을 때, 그때 주체할 수 없는 감정으로 눈물이 터졌다.

작은 마을 모스(mos)에서는 실제 사람크기의 허수아비를 많이 세워두었다. 추수를 방해하는 새를 쫓아낼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능청스러운 여유를 즐기면서 걷는다.

작은 마을 모스(mos)에서는 실제 사람크기의 허수아비를 많이 세워두었다. 추수를 방해하는 새를 쫓아낼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능청스러운 여유를 즐기면서 걷는다.

도보순례의 매력은 시골마을을 지나는 것이다. 특별한 화려함이 없더라도 붉은 기와지붕, 꽃과 들녁의 평화로움은 순례자에게 위안이 된다.

도보순례의 매력은 시골마을을 지나는 것이다. 특별한 화려함이 없더라도 붉은 기와지붕, 꽃과 들녁의 평화로움은 순례자에게 위안이 된다.

“아녜요. 내가 미안해요. 당신은 잘못 없어요.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고 미안해요.” 이번에는 영어로 말하지 않았다. 스페인말에 한국말로 눈물을 찔끔거리며 사과했고 감사했다.

“레이디, 괜찮아요. 당신 잘못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안토니오와 청년이 더 당황한 눈치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오전 내내 허둥대다 실수하고, 빗속을 뛰어 돌아와 애태우고 걱정하다가 결국 경찰까지 출동시킨 후 죄 없는 청년을 난감하게 만든 몇 시간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눈물로 쏟아져 그치질 않았다.

산티아고에 가까워지면서 성 야고보의 성상이 자주 눈에 뜨인다. 레돈델라에 있는 15세기에 지어진 산티아고 성당.

산티아고에 가까워지면서 성 야고보의 성상이 자주 눈에 뜨인다. 레돈델라에 있는 15세기에 지어진 산티아고 성당.

“너무 다행이에요. 당신이 스페인에 와서 도둑을 맞은 게 아니라서. 다 잘 된 거예요.”
물건을 흘리고 나와서 오히려 기억할 수 있는 하루가 되지 않았냐며 안토니오는 거듭 나를 안심시켰다. 풍성한 눈썹도 안토니오에게 나를 달래라고 했다. 스페인어를 어떻게 알아들었냐고? 그건 통역으로 알아듣는 것이 아니다. 고개를 5도쯤 옆으로 기울이고 눈꼬리를 축 내린 후에 웃으면서,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하는 말이 그럼 무엇이었을까?

결국 스페인 경찰, 풍성한 눈썹이 알베르게 책임자에게 연락해 문을 열어주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스페인의 공립 알베르게는 경찰국의 지휘·감독을 받는다고 한다. 안토니오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가 얌전히 나를 기다리던 파우치와 시계를 찾아 나왔다. 헤어지기 전, 나는 그에게 안토니오 반데라스를 닮았다고 했다. 딴에는 칭찬이었는데 그는 천천히 앞머리를 넘기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다들 그러지만 솔직히 제가 훨씬 낫죠.” 그제야 맘 놓고 깔깔 웃음이 나왔다.

레돈델라에 있는 공립알베르게. 편의성을갖추고 도시 초입에 있어 인기가 많고 빨리 숙소가 마감된다.

레돈델라에 있는 공립알베르게. 편의성을갖추고 도시 초입에 있어 인기가 많고 빨리 숙소가 마감된다.

포르투갈의 숲이 깊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이면 더욱 진한 피톤치드의 향을 느낄수있다.

포르투갈의 숲이 깊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이면 더욱 진한 피톤치드의 향을 느낄수있다.

요란한 아침을 보내고 유칼립투스 향기가 가득한 야트막 산을 두 개 넘었다. 오르막과 내리막길이 반복되지만 완만한 각도라 한국 산처럼 절대적 산행은 아니었다. 왜 그런지 유칼립투스 향은 번번이 치료실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 ‘피톤치드 치료실이란 것이 있다면 이런 향기로 가득하겠지.’ 그런 상상을 하면서 숲 향기에 흠뻑 젖어 걷다가 작고 아름다운 마을 모스(Mos)를 지났다.

숙소 문을 열겠다고 경찰을 출동시킨 꼴이 돼버린 아침드라마를 찍느라 출발이 늦었지만 15km를 힘차게 걸어 레돈델라(Redondela)에 도착했다. 산티아고까지는 90여 km, 며칠 남지 않았다. 다시 비 예보. 15세기에 지은 레돈델라의 산티아고 성당 주변을 돌면서 밤새 퍼붓고 내일 걷기 시작할 때는 맑음이길 되는 날씨, 딱 그거 하나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기도했던 것 같다.

기도가 잘못된 것이었을까 아니면 경찰까지 출동시키고도 운 좋게 넘어간 대가를 결국 지불해야 했던 걸까. 까미노 전체를 통틀어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상처가 선명히 남은 재앙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기업인·여행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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