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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차르’ 푸틴 뒤 검은 배후의 야욕···이젠 소련시대 재건?

중앙일보

입력

"러시아군에 영광 있으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사실상 자신의 종신 집권을 노린 개헌 국민투표를 앞둔 지난달 22일 모스크바 외곽의 러시아군 대성당을 찾아 이렇게 외쳤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승전 75주년을 기념해 러시아군이 착공 600일 만에 최근 완성한 성당이었습니다.

[알지RG]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가운데)이 지난 6월 22일 러시아군 대성당을 찾아 참배했다. 이 성당은 제2차 세계대전 승전 75주년을 기념해 최근 완공됐다. 이를 상징하기 위해 성당 계단은 독일군 전차 장갑을 녹여 만들었고, 황금빛 첨탑은 75m 높이로 지어졌다. [A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가운데)이 지난 6월 22일 러시아군 대성당을 찾아 참배했다. 이 성당은 제2차 세계대전 승전 75주년을 기념해 최근 완공됐다. 이를 상징하기 위해 성당 계단은 독일군 전차 장갑을 녹여 만들었고, 황금빛 첨탑은 75m 높이로 지어졌다. [AP=연합뉴스]

'대조국 전쟁'으로 불리는 2차대전에서 푸틴은 형을 잃었습니다. 또 의용군으로 참전한 그의 아버지는 크게 다쳤죠. 그런 희생 위에 열었던 '위대한 소련시대'에 대한 향수가 러시아엔 여전히 뿌리 깊이 남아있습니다. 

푸틴은 이번 개헌이 '애국심과 전통이란 보수적인 가치관에 기초한 국가통합 강화'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상징적 장소를 찾은 겁니다. 개헌안에서 러시아가 옛 소련을 잇는 대국이란 점을 내세운 것도 같은 이유에서죠.

◇'황제'가 필요한 세력들

푸틴의 소망대로 이달 1일 치러진 국민투표에선 78%가 넘는 압도적인 찬성표가 나왔습니다. 개헌이 확정되면서 현재 2024년까지인 푸틴의 임기는 최장 2036년까지 연장할 수 있게 됐습니다.

푸틴의 나이가 이미 러시아 남성의 평균 수명인 68세에 도달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종신 집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야흐로 '황제 푸틴'의 시대가 열린 겁니다.

지난 1일 러시아 전역에서 개헌 국민투표가 열린 가운데 모스크바의 한 투표소에서 마스크를 쓴 여성이 투표를 하고 있다. 이번 개헌 결과로 푸틴 대통령은 현 임기인 2024년 이후 6년 임기의 대통령직에 두 차례 더 도전할 수 있게 됐다. [AP=연합뉴스]

지난 1일 러시아 전역에서 개헌 국민투표가 열린 가운데 모스크바의 한 투표소에서 마스크를 쓴 여성이 투표를 하고 있다. 이번 개헌 결과로 푸틴 대통령은 현 임기인 2024년 이후 6년 임기의 대통령직에 두 차례 더 도전할 수 있게 됐다. [AP=연합뉴스]

최근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런 푸틴의 초장기 철권통치가 가능했던 배경을 현지에서 집중 조명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이번 개헌의 문을 연 장본인들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푸틴의 퇴위를 바라지 않는 여당 의원과 고위 관료, 군부, 신흥 재벌(올리가르히) 같은 기득권 세력의 연합입니다.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선 '황제'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만 했던 겁니다. 실제로 이들이 개헌에 개입한 정황은 다분합니다.

◇초안엔 없었던 '임기연장' 

지난 1월 푸틴이 연차교서를 통해 밝힌 개헌 초안엔 '임기 연장 조항'이 없었다는 점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오히려 당시 푸틴은 별도의 자리를 마련해 안정적으로 수렴청정할 구상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푸틴의 연차교서 발표 이후 불안감을 느낀 정·재계 인사들과 지지자들은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하원의장은 대놓고 "푸틴 없는 러시아는 없다"고 공언할 정도였습니다. 

반전이 일어난 건 지난 3월 10일 열린 러시아 국가 두마(하원) 본회의에서입니다. 이날 단상에 오른 세계 최초 여성 우주비행사 출신의 여당 의원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는 "국민이 바란다면 현 대통령이 다시 출마할 수 있도록 헌법을 고쳐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본회의장엔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푸틴 면전서 '존경' 난무

얼마나 간절한지, 소련 시절에나 봤던 '개인숭배' 현상까지 나타납니다. 일례로 지난 4월 7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정부 대책회의에 참석한 한 의료기관 대표는 푸틴 앞에서 "각하께서 국가를 위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는지 알게 됐다"고 아양을 떨었습니다.

미하일 미슈스틴 총리가 지난달 2일 모임에서 "존경하는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러시아식 중간이름, ‘~비치’는 '누구의 아들'이란 뜻)"란 말을 10분 동안 4차례나 했다는 현지 보도까지 나왔습니다.

지난 3월 6일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이바노보시를 방문해 현지 주민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장기 집권에도 불구하고 푸틴의 인기는 여전히 높다. [AP=연합뉴스]

지난 3월 6일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이바노보시를 방문해 현지 주민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장기 집권에도 불구하고 푸틴의 인기는 여전히 높다. [AP=연합뉴스]

심지어 러시아군 대성당 벽에 장식할 모자이크화까지 푸틴 찬양에 동원될 뻔했습니다. 당초 군부 고위층은 2014년 우크라이나령 크림반도 병합 당시 군인들에 둘러싸인 푸틴을 모자이크화로 형상화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푸틴 본인의 반대로 무산된 겁니다.

압권은 과격주의자들의 주장입니다. 극우 단체인 '쌍두 독수리(러시아 국가문장을 의미)'의 콘스탄틴 말로페예프 의장은 지난 2월 22일 모스크바 외곽에서 가진 총회에서 "(개헌은) 입헌군주제로 가는 게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외쳤습니다. 한마디로 푸틴을 제정 러시아의 차르(황제)처럼 모시자는 노골적인 표현인 거죠.

◇검은 배후는 옛 KGB 동료

푸틴 옹립 세력 중 단연 눈에 띄는 사람은 정권 내부에 있습니다. 소련 시절 푸틴과 국가보안위원회(KGB)에서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연방안전보장회의 서기입니다.

그는 러시아적 전통과 보수적 가치를 주창하는 보수반동 세력, 이른바 '수호자'의 중심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배후에서 푸틴의 통치 기반을 다지기 위한 여론전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러시아 공군 수호이(Su)-35S 전투기 등이 지난달 20일 '2차대전 승전 75주년 기념 군사퍼레이드' 리허설을 위해 모스크바 상공을 비행하고 있다. 푸틴은 집권 이후 '강한 러시아' 복원에 힘써왔다. [AFP=연합뉴스]

러시아 공군 수호이(Su)-35S 전투기 등이 지난달 20일 '2차대전 승전 75주년 기념 군사퍼레이드' 리허설을 위해 모스크바 상공을 비행하고 있다. 푸틴은 집권 이후 '강한 러시아' 복원에 힘써왔다. [AFP=연합뉴스]

지난달 현지 신문에 발표한 '러시아에 보편적 가치가 필요한가'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선 서구의 개인주의와 소비문화를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소련 붕괴는) 지정학적인 대참사"라고 주장했습니다. 소련 붕괴 직후처럼 서방이 지금도 각종 제재 카드로 러시아 내정에 간섭하고 있다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겁니다.

이런 주장은 러시아 사회에 상당한 파급력을 갖습니다. 소련이 무너진 뒤 파탄 난 국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강한 러시아'로 변모시킨 푸틴의 공적을 각인시킬 수 있는 좋은 장치라는 얘기입니다. 

◇'21세기 얄타회담' 꿈꾸나

러시아 내에선 적수가 없는 '황제 푸틴'의 다음 스텝은 뭘까요? 푸틴은 21세기 얄타회담을 열길 바랄지도 모릅니다. 독일에 이긴 미·영·소 수뇌가 1945년 2월 크림반도의 얄타에 모여 전후 질서를 협의한 것처럼 새로운 세계질서를 세우는 것이죠.

에너지·군사대국인 러시아의 역할을 내세우는 한편 크림반도 침공 이후 불편해진 서방과의 관계도 정리하겠다는 속셈입니다.

지난달 24일 열린 '2차대전 승전 75주년 기념식'에서 푸틴 대통령이 참전 유공자들과 함께 군사 퍼레이드를 관람하고 있다. 푸틴은 전후 소련이 그랬듯 러시아가 세계질서의 중심국가가 돼야 한다는 야망을 품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달 24일 열린 '2차대전 승전 75주년 기념식'에서 푸틴 대통령이 참전 유공자들과 함께 군사 퍼레이드를 관람하고 있다. 푸틴은 전후 소련이 그랬듯 러시아가 세계질서의 중심국가가 돼야 한다는 야망을 품고 있다. [AP=연합뉴스]

시기적으로도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미·중 대결이 격화되면서 또 다른 대국인 중국과는 암묵적인 합의를 이룬 듯합니다.

상대적으로 미국보다는 덜 완강한 유럽과 관계 개선도 승산이 있어 보입니다. 특히 러시아와 가스 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독일이 유럽연합(EU) 의장국으로서 어떤 입장을 취할지 주목됩니다.

가장 중요한 상대인 미국과의 협상은 오는 11월 대선 결과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카운터파트가 도널드 트럼프냐, 조 바이든이냐에 따라서 푸틴의 대응방식도 무척 달라지지 않을까요.

김상진 기자 kine3@joongang.co.kr

※ '알지RG'는 '알차고 지혜롭게 담아낸 진짜 국제뉴스(Real Global news)'라는 의미를 담은 중앙일보 국제외교안보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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