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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코로나19 시대의 공적 신뢰와 사적 신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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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의영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의영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코로나19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조망하는 각종 인식 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있다. 이 중 신뢰 관련 조사 결과가 눈길을 끈다. 우선, ‘대한민국에 대한 신뢰’가 높아진 듯하다. 며칠 전 중앙일보에 발표된 ‘2020년 한국인의 정체성’ 조사 결과를 보면 ‘나는 어떤 다른 나라 사람이기보다도 대한민국 국민이고 싶다’라는 문항에 한국인 10명 중 8명(80.2%)이 그렇다고 답했다.

모두 합심해 K-방역 선방했지만 #세대나 진보·보수 성향 따라 #포용보다는 각자도생 어른거려 #우리사회 신뢰 수준 고민 필요

다른 인식 조사 결과도 봐도 마찬가지다. 한겨레신문 조사 응답자의 66.2%가 ‘우리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라고 평가하고, 74.6%가 ‘코로나19 이후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더 높아졌다’라고 인식한다. 시사IN·KBS 공동조사 결과를 보면 국가의 총체적 역량에 있어 응답자의 70%가 한국이 선진국보다 더 우수하거나(39%) 비슷하다고(31%) 생각한다. ‘이게 나라냐’를 외치던 때와 확연히 다르다.

‘일반 시민의 역량에 대한 신뢰’도 높게 나온다. 일반 시민의 역량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84%가 한국이 선진국보다 더 우수하거나(58%) 비슷하다고(26%) 평가한다. 또한, 응답자의 64%가 코로나19 이후 ‘우리 국민은 단결이 잘 되는 편이다’라고 생각을 바꾼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국민은 확산 방지를 위해 개별적으로 위생관리를 잘하고 있으며’(75.8%), ‘우리 사회의 시민 의식은 성숙해 있다’(67.0%)라고 생각한다. 우리 시민들은 ‘내가 코로나19에 감염되는 것’보다 ‘나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감염되는 것’을 훨씬 더 두려워한다. 85%의 응답자가 ‘마스크 안 쓴 사람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서로 믿고 위하며 돕는 ‘사적 신뢰’의 수준이 높다는 점을 시사한다.

‘정부와 공공 부문의 역량에 대한 신뢰’의 수준 또한 높아 보인다. 가령 75.2%의 응답자가 ‘대한민국 정부의 코로나19 대응 능력은 신뢰할 만하다’라고 생각하고, ‘내가 낸 세금이 제대로 쓰인다고 믿게 되었다’라는 응답이 43%나 된다. 이러한 공적 신뢰와 사적 신뢰는 K-방역, 즉 한국의 모범적 코로나19 대응 모델의 두 축으로, 이 두 축이 잘 맞물려 돌아갔기에 한국이 선방할 수 있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한마디로, 정부는 모든 것을 투명하게 알리며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믿음을 줬고, 일반 시민들은 신뢰·연대·협력으로 부응했다는 것이다.

밝은 면은 여기까지다. 조사 결과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두운 면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먼저 공적 신뢰와 관련하여, 구체적인 기관별 신뢰를 보면 문제가 보인다. 코로나19 이후 기관 신뢰도 변화에 있어 질병관리본부와 의료체계·기관에 대한 신뢰가 가장 큰 폭으로 늘었고 청와대와 정부에 대한 신뢰도 어느 정도 높아졌다. 반면 종교기관, 국회, 언론의 순으로 신뢰도가 가장 급격하게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종교기관의 신뢰 위기야 신천지 때문이라고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국회와 언론은 얘기가 다르다. 코로나19 시대의 온갖 난제를 해결하고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공적 숙의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상황에서, 국회와 언론에 대한 신뢰가 줄어들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사적 신뢰 부문도 미묘한 문제를 드러낸다. 위에서 봤듯이, 추상적인 일반 시민에 대한 신뢰의 수준은 높게 나온다. 그러나 ‘이웃 사람’과 ‘낯선 사람’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물으면, ‘이웃 사람’에 대한 신뢰는 높아졌지만, ‘낯선 사람’에 대한 신뢰는 훨씬 낮아진 것을 알 수 있다. 외국인과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신뢰는 낮아지고 사회적 거리감은 더 커졌다. 외국인을 받아들이는 데 더 소극적이고, 탈북자·결혼이민자·국제결혼 가정의 자녀에 대해서 남 또는 남에 가깝다는 답변이 늘어났다. ‘국제결혼가정 자녀는 한국인, 36%→17% 오히려 줄었다’가 중앙일보 조사 결과 머리기사 제목이다. 한민족·아시아인·세계인으로 느끼는 소속감, 즉 정체성의 범위도 2015년까지 늘어나다가 2020년 조사에서는 줄어들었다.

응답자들 사이에 세대, 진보와 보수, 문재인 대통령 지지 여부 등에 따라 신뢰 성향이 상이하게 나타나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도 신경이 쓰인다. 즉 신뢰의 범위(radius of trust)가 오히려 협소해졌으며, 포용과 협력보다는 차별과 각자도생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 같아 우려를 자아내는 대목이다.

신뢰는 한 사회의 집합적 행동(collective action)을 수월하게 하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다. 협력의 윤활유 같은 것이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와 퍼트남(Robert Putnam) 같은 전문가들은 끼리끼리의 결속형(bonding) 사회적 자본을 넘어 서로 다른 집단을 연결하는 가교형(bridging) 사회적 자본과 시민사회와 공적 부문 사이의 신뢰를 의미하는 연계형(lingking) 사회적 자본을 중시한다. 국경 없는 ‘팬데믹’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전 지구적 차원의 글로벌(global) 사회적 자본도 어떻게든 구축해 내야 한다. K-방역 덕분에 여기까진 왔다. 이제 우리 사회의 공적·사적 신뢰의 수준과 범위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성찰과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의영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