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지휘권 박탈은 형성적 처분으로서 쟁송절차에 의해 취소되지 않는 한 지휘권 상실이라는 상태가 발생한다.”
“쟁송으로 취소 안되면 지휘권 상실” #명시적 언급 피하며 지시 수용 효과 #검찰 내 사퇴 반대론 염두에 둔 듯 #법무부 “만시지탄이나 바람 부합”
9일 대검찰청이 사실상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지휘를 100% 수용하면서 내놓은 입장문의 핵심 구절이다. 형식적으로나마 ‘총장의 명시적 직접 수용’이라는 형식을 피하려 한 윤석열 검찰총장의 고심이 읽히는 대목이라서다.
법무부와 대검 등에 따르면 윤 총장은 지난 2일 추 장관의 지휘 공문이 내려온 순간부터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부작위(不作爲)를 통해 지휘권을 수용하는 모양새를 취하려 했다는 게 측근들의 전언이다. 다시 말해 수용 여부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침묵하면서 실질적인 수용 효과를 내려 했다는 의미다. 실제 윤 총장은 3일 열린 고검장 회의에서 이미 ‘부작위 전략’을 밝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의중은 입장문 속 ‘형성적 처분’이라는 표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는 ‘처분이 내려지는 순간 받아들이는 사람의 의사와 관계없이 효력이 발생하는 처분’이란 뜻이다. 윤 총장의 의사와 관계없이 지난 2일 지휘권 발동 순간부터 이미 채널A 사건 수사에 대한 총장의 지휘 배제 효과가 발생했다는 의미다.
윤 총장이 명시적 수용 형식을 피하려 한 건 거취 문제에 대한 논란 가능성 때문으로 분석된다. 2005년 천정배 당시 법무부 장관이 지휘권을 발동해 강정구 동국대 교수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 대한 불구속 수사를 지시하자 김종빈 당시 검찰총장은 명시적으로 이를 수용한 뒤 항의의 표시로 사표를 냈다. 장관 지휘를 수용하면서 총장이 수사팀의 독립성을 지켜주지 못한 모양새가 됐기 때문에 사퇴가 불가피했다고 보는 것이 법조계의 시각이다.
윤 총장 역시 명시적으로 지휘 수용 의사를 비쳤을 경우 사퇴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될 수 있었다. 현재 검찰 내부에서는 총장 사퇴 반대 여론이 우세한 상황이다. 윤 총장이 자기 생각만으로 거취를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의미다.
‘쟁송절차로 취소되지 않는 한’이라는 가정을 단 것 역시 추 장관 지휘의 적법성을 인정한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권한쟁의심판이나 불복소송 등 법적 절차를 검토할 수 있다는 여지만은 남겨둔 셈이다.
이에 대해 법무부는 9일 입장문을 내고 “만시지탄이나 이제라도 장관의 지시에 따라 수사 공정성 회복을 위해 검찰총장 스스로 지휘를 회피하고 채널A 사건 수사팀이 독립적으로 수사할 수 있도록 결정한 것은, 공정한 수사를 바라는 국민의 바람에 부합한다”고 밝혔다. 추 장관이 입장문의 형식과 상관없이 사실상의 100% 지휘 수용 결정에 대해 환영의 뜻을 표한 것으로 풀이된다.
검사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한 일선 검사는 “‘장고 끝에 악수’가 아니냐. 어차피 ‘백기 투항’할 거였다면 지휘 공문이 내려온 직후에 수용 의사를 밝히는 게 나을 뻔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반면 대검의 한 간부는 “법률적으로 위법이라는 입장에는 변화가 없으며 수용 여하와 관계없이 그 자체로 효력이 발생한다는 사실만 인정한 것”이라며 “‘백기 투항’이라고 보는 건 섣부르다”고 말했다.
정유진·강광우 기자 jung.yooj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