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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국의 퍼스펙티브

단임의 고민…나는 역사에 어떤 대통령으로 기록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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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대통령의 이름 

김진국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김진국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옛날 임금들은 죽은 뒤 시호(諡號)가 붙여졌다. 그 사람의 행적과 업적, 공과 등을 반영해 글자를 정했다. 시호를 보면 그 사람의 핵심 공적을 알 수 있다. 요즘은 그런 이름이 없지만, 핵심 이미지는 별명처럼 붙어 다닌다. ‘건국 대통령’ ‘문민 대통령’…. 그것이 역사를 두렵게 한다.

마지막 1년은 차기 후보의 시간 #8개월 동안 무슨 이름 만들까 #조국에 집착해 진보 가치 잃고 #일자리, 부동산 이어 북한까지…

문재인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남북 정상회담을 가장 많이 했다. 처음으로 북·미 정상회담도 만들어냈다. 첫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을 뛰어넘을 기세였다. 시호에 ‘평화’를 넣고 싶지 않았을까. 그런데 최근 북한이 쏟아내는 막말을 들으면 우롱당한 느낌이다.

문 대통령은 북한 핵이라는 위험 관리보다 대화 유지에 매달렸다. 그 사이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은 거침없이 발전했다. 큰 성과로 꼽았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북한 실세인 김여정은 문 대통령을 향해 ‘현 사태의 본질을 알고나 있는지’ ‘멋쟁이 시늉’이나 하고 ‘맹물 먹고 속이 얹힌 소리’를 한다고 비난했다.

남북 대화는 물론 북·미 대화도 단절됐다. 북한은 실무자까지 나서 “때도 모르고 또다시 조미 수뇌회담 중재 의사를 밝힌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라고 조롱했다. 이대로 끝난다면…. 북한 문제가 업적이 아니라 최대의 실책으로 기록될 수 있다.

차기 정부로 가는 일정

차기 정부로 가는 일정

차기 대통령 선거는 2022년 3월 9일이다. 1년 8개월, 608일 남았다. 임기 말 1년은 사실상 ‘차기 주자의 시간’이다. 문 대통령이 출마했던 2012년에는 선거 다섯 달 전 후보 경선을 시작했다. 내년 9월이다. 선거 1년 전인 내년 3월, 당 대표와 최고위원은 사퇴해야 민주당 후보 경선에 참여할 수 있다. 선거 체제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8개월 남았다.

11월 3일은 미국 대통령 선거일이다. 지금은 북한 문제를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에 불리해 보인다. 조셉 윤 전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북한도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미국 대선 전에는 대화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문 대통령은 조급할 수밖에 없다. 지난 3일 외교·안보 라인에 가용 인력을 모두 쏟아부은 이유다.

2017년 5월 10일 취임한 이후 3년 2개월, 1157일이 지났다. 문 대통령은 그동안 무엇을 했을까. 왜 북한 문제에 모든 걸 걸려고 할까. 다른 업적으로 기록될 순 없을까.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국정과제 몇 가지를 짚어보자.

적폐 청산과 내로남불

국정 과제로 적폐 청산을 제일 앞에 올렸다. 촛불 정부의 사명이다. 반부패도 앞세웠다. 과거 정부의 국정 농단은 사법부가 할 일이다. 정치적으로 나서면 보복이 된다. 그렇지만 다시는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제도를 개혁하는 것은 정치가 할 일이다. 국정을 농단한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 소통의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 실제로는 사회 전 분야에서 반대 진영 축출작업이 벌어졌다. 대통령의 힘은 더 집중했다. 사법부·입법부까지 장악했다. 제도 개혁보다는 인적 청산이 중심이 됐다.

공수처법을 통과했다. 그러나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등 대통령 측근들의 잇따른 비리 혐의 수사를 둘러싸고 갈등이 이어지면서 검찰 개혁인지, 수사방해인지 혼란을 초래했다.  문 대통령은 자신이 임명한 검찰총장을 향한 여권의 총공세를 이도 저도 아니게 방치했다. ‘내로남불’이란 말이 유행어가 됐다.

우롱당한 연동형 선거법

개헌은 촛불의 완성이라고 했다. 제왕적 대통령을 제도적으로 막을 수 있는 길이다. 개헌과 정치개혁을 국정과제로 올렸다. 문 대통령은 2018년 3월 26일 개헌안을 국회에 넘겼다. 그러나 “개헌 논란을 막을 절묘한 한 수”(민주당 한 중진 의원)였다. 개헌은 국민적 동의가 있어야 한다. 정치권의 합의는 말할 것도 없다. 대통령의 일방적 발의가 개헌의 불씨를 꺼버리는 사태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촛불 정신인 분권과도 거리가 있다.

선거법 개혁은 더 한심하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하겠다면서  신속처리안건에 올렸다. ‘준연동형’에 ‘캡’을 씌우고 누더기로 만들었다. 그것마저 선거 때는 위성정당을 만들어 무력화했다. 미래통합당 핑계를 댔다. 하지만 군소정당도, 국민도 모두 속였다.

역대 대통령의 이미지

역대 대통령의 이미지

일자리 참극은 코로나 탓?

문 대통령은 청와대에 들어가자 일자리 상황판부터 만들었다. 그러나 참극이 벌어지고 있다. 모든 수치가 최악이다. 지난 5월 실업자 수는 127만8000명이다. 실업률은 4.5%다. 잠재적 실업자와 부분 실업자를 포함한 확장실업률은 14.5%다. 청년층의 고통은 더 심각하다. 만 15~29세 확장실업률은 26.3%다. 모두 최고 기록이다.

이 정부 초기에는 이전 정부의 책임, 지금은 코로나 탓이다. 재정을 쏟아부어 단기 일자리를 만들고 있다. 실제 상황은 더 어렵다는 말이다. ‘일자리 대통령’으로 기록되기는 어렵게 됐다.

또 하나의 폭탄은 부동산이다. 문 대통령은 청년 주거 부담을 경감하겠다고 약속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서울 아파트 중위 매매 가격 상승률은 45.1%. 강남 아파트는 말할 것도 없다. 역대 정부 중에 가장 많이 올랐다. 6·17 대책까지 무려 21번의 정책을 쏟아낸 결과다. 권력 핵심부 인사들도 ‘강남 불패’를 실천으로 입증했다. 부동산 정책에 실패한 정부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저출산과 희망사다리 복원 공약도 함께 추락했다.

반기문 국가기후환경회의 위원장은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기후 악당’이라고 비판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 미세먼지, 대기 질과 관련해 OECD 36개 회원국 가운데 35위, 36위”라며 석탄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재생에너지로 탈원전을 감당할 수 없다. ‘환경 대통령’보다 ‘기후 악당’이 더 가까워 보인다.

비대칭 위협에 강력한 대응?

국정과제로 북한 핵무기의 ‘비대칭 위협’에 대한 대응 능력을 강화하겠다고 올려놨다. ‘비대칭’은 핵무기에는 핵무기 이외의 대응수단이 없는 ‘절대 반지’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가 핵무기를 갖는 것도, 미국의 확고한 핵우산을 쓰는 것도 아니다. 사드 논란이 보여준다. 문 대통령은 압박보다 달래는 쪽이다. 어떤 양보와 선물을 보내면 북한이 만족할까. 임기 중 북한 핵이 사라질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주변 4국과 당당한 외교’라는 국정과제도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한·미 공조는 불안하다. 일본과는 최악의 냉전 중이다. 중국의 사드 보복은 끝날 줄을 모른다. 이게 당당한 건 아니다. 현명하고 실용적인 외교와는 더욱 거리가 멀다.

역대 대통령의 별명은

대통령은 재임 중 많은 일을 하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몇 가지다. 그중에서도 별명처럼 따라붙는 업적이 있다. 책 속에 남은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열성 팬 사이에 살아 있는 대통령도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건국 대통령’이다. 6·25전쟁에서 나라를 지켰다. 부정선거와 하야, 망명은 어두운 기록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산업화 대통령’이다. 보릿고개를 이기고, 먹고 살게 하였다. 유신독재와 피살이라는 아픈 기록도 남겼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광주 학살의 죄과가 너무 크다. 단임 실천과 물가 안정은 가려질 수밖에 없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북방외교가 뚜렷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하나회 해체로 정권 교체가 가능하게 길을 열었다. 금융실명제, 재산 공개도 부패를 막는 큰 업적이다. 임기 말 외환위기는 그런 업적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이 돋보인다. 벤처 육성으로 IT산업의 기반을 만든 건 잘 보이지 않는 큰 업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권위주의를 깨부수고, 지역주의와 싸운 ‘시민 참여 대통령’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4대강과 청계천 정비,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 대통령’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김진국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