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심석희 겪고도 故최숙현 SOS 무시, 체육계는 변한게 없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국가대표와 청소년 대표로 뛴 23세의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 선수 고(故) 최숙현 씨가 2013년 전국 해양스포츠제전에 참가해 금메달을 목에 거는 모습. [연합뉴스]

국가대표와 청소년 대표로 뛴 23세의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 선수 고(故) 최숙현 씨가 2013년 전국 해양스포츠제전에 참가해 금메달을 목에 거는 모습. [연합뉴스]

3년 전 '체육계 미투 1호' 김은희(29) 테니스 코치를 만났다. 김 코치는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초등학생 시절 자신을 성폭행한 테니스 코치를 처벌하기 위해 증거를 모으고, 증인을 수소문하는 등 모든 일을 홀로 감당하고 있었다. 문화체육관광부, 대한체육회, 대한테니스협회 등 관계 기관에 신고했지만 그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김 코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김 코치는 가해자가 처벌받는 것 이외에도 체육계에서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기자로 할 수 있는 건 김 코치의 사건을 기사로 써서 세상에 알리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대한체육회 고위직 인사와 김 코치와 면담 약속을 잡아주는 것이었다. 김 코치와 고위직 인사가 만나는 자리에 함께 갔다.

김 코치는 그동안 문체부, 대한체육회 등 상급 기관으로부터 외면당했어도 그 면담이 피해받고 있는 선수들을 도와줄 계기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김 코치는 제대로 응답하지 않는 상급 기관의 신고 시스템, 가해자를 제대로 징계 내리지 않는 관행 등을 꼬집었다. 그 인사는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 의견을 받아들여 꼭 고치겠다"고 했다. 김 코치를 불러 선수들에게 경험담을 나눠주는 시간도 정기적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15년 만에 성폭행 코치 처벌 후, 다른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나선 김은희 테니스 코치.

15년 만에 성폭행 코치 처벌 후, 다른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나선 김은희 테니스 코치.

그러나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김 코치는 실망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김 코치는 스스로 미투 캠페인 블로그를 만들어 피해를 입은 선수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많은 선수들이 용기냈다. 때로는 기자의 이메일을 통해 김 코치의 연락처를 묻기도 했다. 김 코치로부터 피해 선수를 제보받으면 해당 체육단체에 연락하고 취재했다. 그런데 많은 피해 사례는 묻혀졌다. 용기를 냈던 피해 선수들도 움츠러들었다.

1년 전 체육계 미투가 다시 한번 주목받았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심석희 같은 대형스타도 코치로부터 폭행과 성폭행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서 "체육계 가해자들에게 엄중한 처벌을 내리고 쇄신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문체부와 대한체육회는 부랴부랴 체육계 폭행, 성폭행 근절 안을 내놨다. 너무 원론적이고 뻔해서 기억도 잘 안 나는 내용들이었다.

최숙현 선수가 생전 남긴 일기장의 일부. [사진 최숙현 선수 가족]

최숙현 선수가 생전 남긴 일기장의 일부. [사진 최숙현 선수 가족]

다시 1년 후, 김 코치와 심석희와 똑같은 사건이 터졌다. 트라이애슬론 최숙현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고 최숙현도 김 코치가 그랬던 것처럼 관계 기관에 신고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박양우 문체부 장관과 최윤희 문체부 2차관은 이 사건에 대한 정보도 언론을 보고 알았다고 한다. 이번에도 문재인 대통령이 나섰다.

관련기사

그럼 이제 김 코치, 심석희, 고 최숙현 선수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장담하지 못하겠다. 대중의 관심이 사라지면, 체육계는 수십 년 동안 그런 것처럼 미온적인 입장으로 돌아갈 것이다. "계속 주시하면 되지 않나요?"라고 묻는다면, 역시 장담하지 못하겠다.

대중에게 체육계의 부조리한 관행들은 남의 일이기 때문이다. 재난지원금이나 최저임금 이슈처럼 당장 내가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관심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김 코치 사건도, 심석희 사건도 희미해졌다. 그렇게 고 최숙현 사건이 발생했다.

문체부와 대한체육회는 화제가 된 사건만으로도 삼진 아웃당했다. 그래도 체육계 관행은 여전할 것이다. 문체부와 대한체육회의 응답은 여전히 느릴 것이다.

박소영 기자 psy0914@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