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의 미국 대선 전 북·미 정상회담 개최는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소리다. 현실을 무시한 일방적 희망사항인 탓이다. 북핵에 관한 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여전히 대척점에 서 있다. 북한은 제재 해제부터, 미국은 비핵화부터 하라는 대치 상황은 한 치도 안 변했다. 게다가 11월 미 대선 가도에는 못 만날 이유만 널렸다.
북한 문제, 사소한 이슈로 전락해 #김정은도 대선 후를 원할 게 확실 #선거 일정상 트럼프 출국도 난망
무엇보다 재선을 노리는 트럼프에게 북한 문제는 사소한 사안이 됐다. 지난해 말 갤럽 조사에서 미 유권자들이 중시하는 대선 이슈 중 대외정책은 16개 중 14위였다. 1위는 건강보험으로 안보·총기규제·교육·경제 등이 뒤를 이었다.
대외정책이 이 정도 관심을 끈 것도 미·중 갈등, 이란 핵 등 다른 굵직한 사안 덕이다. 워싱턴의 한 전문가는 이렇게 단언한다. “지금 트럼프의 머릿속에 북한은 없다”고. “북한에 관심이 있었다면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때 뭐라도 트윗을 했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실제로 그가 공개석상에서 먼저 북한 관련 발언을 한 건 지난 3월 초가 끝이었다. 그러니 그가 대선 막판에 북한 문제에 몰입하길 기대하는 건 망상이다.
둘째, 김정은도 안 만나려 할 거다. 대선이 코앞인 상황에서 경쟁자 조 바이든보다 지지율이 10%포인트나 낮은 트럼프를 상대하려 하겠는가. 북한은 1990년대 제네바 합의를 이뤄내는 등 클린턴 행정부와 잘 지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별안간 미국이 적대적으로 변한 경험을 못 잊을 것이다. 그런 북한이 똑같은 위험을 무릅쓰고 대선 전 정상회담에 응할 리 없다. 누가 되든 대선 후 담판을 짓는 게 합리적이다. 지난 4일 발표된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담화는 이런 추론을 확인시켜 준다. 최 부상은 “북·미 대화를 정치적 위기를 위한 도구로 여기는 미국과는 마주 앉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셋째, 만에 하나 트럼프가 정상회담에 응하려 해도 일정상 불가능에 가깝다. 대선주자를 확정하는 공화당 전당대회는 8월 말. 이때까지 트럼프는 당내 인사들을 다독이며 전폭적 지지를 끌어내야 한다. 전당대회 이후엔 본격적인 유세전으로 각 주를 돌아야 한다. 이런 판에 미국 땅을 떠날 수는 없다. 미 대선후보가 외국에 가는 사례가 극히 드물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런 예외적 상황은 2015년 말 파리 테러 때처럼 안보 문제가 선거 이슈로 부각됐을 경우다. 지금으로선 북한 문제는 여기에 해당할 기미가 없다. 이론적으론 김정은이 미국에 가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하노이에서 수모를 겪은 그가 완벽한 사전 조율도 없이 갈 리가 없다. 북·미 접촉 자체가 실종된 터라 11월 전 완벽한 사전 조율은 불가능한 얘기다.
한쪽에선 북·미 간 활발한 대화 조짐이 있어 정상회담 가능성이 작지 않다는 반론도 나온다. 최근 스티븐 비건 부장관을 비롯해 데이비드 스틸웰 차관보, 해리 해리슨 주한 대사 등 국무부 당국자들이 일제히 나서 북한과의 대화를 촉구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미국이 정상회담에 관심이 있다는 증거로 여기면 착각이다.
대북 대화론자들이 강조하는 협상의 장점 중엔 이런 게 있다. “북한도 대화 중에는 도발을 삼간다”는 거다. 당연한 얘기다. 대화로 풀자면서 핵폭탄을 터트리고 미사일을 쏴댈 수는 없지 않은가. 트럼프 측도 여기에 착안해 북·미 대화를 도발 억제책으로 활용하려는 듯하다. 요컨대 트럼프 진영은 북핵 카드를 치적이라며 흔들어 보일 생각은 없지만, 북한의 도발을 막기 위해 대화는 시도한다는 얘기다.
이처럼 양쪽 모두 생각이 없는데도 정부는 북·미 정상회담에 올인하고 있다. 대북 송금 업보가 있는 박지원 전 의원을 국정원장에 앉힌 것을 비롯해 강성 대화론자들을 주요 포스트에 전진 배치했다. 온갖 수모에도 불구하고 무슨 수를 쓰더라도 북·미 회담을 이루겠다는 신호다. 뭐가 그리 급한가. 썰물 때 배 띄우려다간 좌초하기 마련이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