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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마스크 너머 여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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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자진 격리 중이던 지난 2월 말, 돌밥에 지쳐 반찬 앱을 찾아 주문했다. 결재와 동시에 메시지가 떴다. ‘내일 낮 12시에 배달 예정입니다.’ 시내에서 30킬로 떨어진 산촌인데? 궁금했다. 다음 날 이른 점심을 먹고 동구 밖을 주시했다. 멀리 배송차가 나타난 것은 정확히 12시 5분. 10분 뒤 툇마루에 배달반찬이 얌전히 하역됐다. 비바 코리아!

비대면 분야 기업이 경기침체 완화 #스크린 속 사회엔 감성·열정 결핍 #공감과 동정, 도덕 감정이 증발해 #양극화 정당, 검찰장악은 민주 공적

최근 정부 부처 중 보폭이 가장 넓은 중소벤처기업부 박영선장관이 당연하지만 흥미로운 발언을 했다. 올해 1분기 코스닥 상장기업 중 비대면 분야 기업의 성장세가 두드러진다고. 매출액 상승률 2배, 영업이익 상승률 15배, 고용창출 3배, 시가총액 상승률 1.5배, 해서 코로나가 몰고 온 경제충격을 비대면 기업이 제대로 방어했다고 말이다 (중소벤처기업부 5월 28일 보도자료).

코로나 습격을 겪은 글로벌 시장에 천지개벽을 이끌 주역은 분명 전통기업이 아니라 비대면 기업이다. 스마트자(字)가 붙는 온갖 유형의 서비스, 온라인 교육, 전자상거래, 게임과 엔터테인먼트, 물류플랫폼, 빅데이터와 클라우드서비스. 세계적 스타 BTS가 유튜브로 방구석에 고립된 영혼을 달랬다.

넉 달간 사회체험을 ‘스크린 속 사회’(Society in Screen)라고 하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서울대 수학과 교수는 작년 대비 학생들 평균 학력이 떨어졌다고 했다. 동영상에 나타난 학생들에게 방정식만 건너갔을 뿐 감성은 스크린에 흡수됐다. 서울대 의대, 생물학은 차이가 없었으나 해부학은 학력이 저하됐다.

나의 강의에 출현한 학생들도 사회현실에 대한 세대 고민을 전달하려고 애를 썼는데 줌(ZOOM)의 냉랭한 스크린에 부딪혀 흩어졌다. 나는 ‘일타 교수’가 되고자 속도를 높였다. 농담에 반응하는 1초가 길었다. 선호도는 엇갈렸다. 학생들은 온라인 강의를 선호하고 교수들은 강의실로 돌아가고 싶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쿨리(C. Cooley)는 일찍이 영상자아(looking-glass self) 개념을 내놨다. 자신의 마음에 비친 ‘타인의 평가’에 의해 진정한 자아가 형성된다는 이론이다. 접촉과 체험이 전제다. 지난 넉 달 동안 사람들은 ‘스크린 속 사회’, ‘스크린 속 타인’과 현실을 추체험했다.

간접 접촉으로 전달된 언어와 이미지는 영상자아의 질료가 결코 못된다. 말하자면, 성찰자원이 유달리 부족한 기간이었다. 자아가 여문 성인들은 편견이 더욱 단단해졌고, 청소년과 청년들은 마음 속 빈집을 지켰을 뿐이다. 초등학생에게 소중한 담임선생의 말투, 몸짓, 교장의 근엄한 표정, 친구들 재잘대는 소리는 체험리스트에서 사라졌다. 대학신입생들도 늙어서 추억할 첫 등교의 두근거림을 영원히 빼앗겼다.

마스크를 쓴 채 여름을 맞는다. 봄 향기는 기억에 없다. 사람들의 눈빛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큰 소득이었다. 봄 향기와 눈빛을 맞바꿨다. 그런데 눈빛에 사회에 대한 경계가 서려 있었다. 정처를 모르는 바이러스 경계심이 무작정 타인에게 들러붙었다. 타인의 눈빛을 수용할 영상자아는 반사적 경계빛을 역으로 발하느라 얼룩덜룩해졌다. 마스크 안 쓴 사람과 마음속에서 시비가 붙었다. 마스크 너머 풍경은 근거 없는 두려움이었다. 어느 날 거리에서 한 무더기 사람들을 피해 멀리 우회하는 나를 발견했다. 나, 사회학자?

행복심리학자 최인철교수가 얼마 전 흥미로운 글을 썼다. ‘내성적인 사람이 온다’ 〈중앙일보 7월 1일자 28면〉. 사회적 거리두기로 외향성의 제국이 붕괴되고, 내성적인 사람들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말이다. 내면에 쌓아둔 양식, 내면과의 대화로 버틸 여력이 풍부한 내성적 사람에게서 행복하락도가 더 낮게 나타난다고 했다. 단기적으론 그럴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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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마스크 너머 사회가 경계대상이자 두려움이라면, 그것도 오래 지속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경계심의 내면화, 고갈된 체험창고로의 불가피한 도피가 발생한다. 후각, 감각, 촉각이 빠진 경계적 체험은 공감(sympathy)과 동정(compassion)을 생산하지 못한다. 오래 전 아담 스미스가 그토록 강조한 ‘도덕감정’의 두 줄기가 소멸되는 것이다.

경제는 생업 현장이자 인생을 제조하는 직기(織機)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경제를 주도할 비대면 기업이 아무리 번성하더라도 인생을 직조하는 현장스토리를 리얼하게 만들어낼지 의문이다. 배송차가 날라 온 그 신선한 봄나물이 재래시장 할머니가 건넨 것만 못했다.

그럼에도 마스크가 고맙다는 느낌이 가끔 든다. 불길한 외부 현실의 틈입을 차단해주리라는 허망한 기대감일 거다. 화적떼처럼 출몰하는 집값 폭등, 여당의 폭주와 징징대는 야당, 시정잡배보다 못한 평양당국은 차단 1호다. 특히 정치! 포퓰리즘 확산을 주시해 온 스탠포드대학 래리 다이아몬드교수가 12개 주범을 꼽았다. ‘야당을 악마취급’, ‘사법부 장악’이 민주국가 공적 1, 2호다. 여름엔 그런 것들을 몽땅 걸러낸 마스크를 벗고 봉숭아꽃과 수국이 어우러진 화단에서 산발하는 냄새를 맡고 싶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