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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승현의 시선

노상 달밤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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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정치에디터

김승현 정치에디터

변변찮은 내 칼럼의 최고 애독자를 잃었다. 지난달 돌아가신 아버지는 아들 칼럼이 신문에 실릴 때마다 전화를 하셨다. “‘작품’ 하나 쓰려면 공부할 게 많지”라는 격려, “적을 만들지는 마라”는 염려와 함께였다. 물가에 내놓은 아들의 경험과 지식이 부족하진 않은지 찬찬히 살폈던 것 같다. 그가 떠난 거실 협탁에도 밑줄 그어진 칼럼 지면이 펼쳐져 있었다.

‘달빛’ 기울자 드러난 앙상한 논리 #청와대 1주택 ‘자폭 쇼’ 악영향 #‘법을 지배’ 접고 실력 고백해야

40년 넘게 이어진 보호막은 이젠 내 가슴과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그중 다시 되내어지는 게 “노상 달밤 아니다”는 말씀이다. 고교 시절 하굣길에 마중 나온 아버지는 밝은 달을 보며 이 알쏭달쏭한 얘기를 자주 했다. ‘노상’은 ‘늘’이라는 의미의 부사다. ‘언제나 변함없이’라는 우리말 ‘노’에 ‘항상 상(常)’이 합쳐진 단어다. “늘 달 밝은 밤은 아니다”라는 말이었다.

당신의 아버지에게서 들은 말이 손자에게 전해진 것이다.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가장 큰 기와집을 직접 짓고 별채에 방앗간을 운영할 정도로 부지런하고 꼼꼼했는데, 자식들에게 엄한 꾸지람 대신 골계미 있는 충고를 많이 했다고 한다. ‘노상 달밤~’은 “훤한 달밤이 계속될 것 같쟤? 금세 달 없고 깜깜한 밤이 온다. 여유 부리다 후회한다”는 사랑의 매였다.

전기가 없던 시대에 만들어져 내려온 금언은 지금도 무릎을 치게 한다. 휘영청 밝던 달도 차면 기울고, 달밤은 영원하지는 않다는 자연의 섭리는 풍족한 현실에 취해 기고만장한 이들에게 묵직한 가르침이다.

개인적인 추억이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지난 3일 사과를 보며 선명해졌다. 이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50% 밑으로 떨어지자 “최근 부동산 시장이 매우 불안정해 국민 여러분께 대단히 송구하다”고 했다. ‘달빛(moonlight)’으로 통하며 꺾일 줄 모르던 문 대통령의 인기가 ‘노상 달밤 아니다’는 섭리와 조우하게 된 것일까.

여권이 직면한 달밤의 위기는 자연 현상을 앞당긴 인재(人災)다. 176석 거여(巨與)의 폭주에 달이 더 빨리 기울고 있어서다.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정부·여당의 주장과 행동의 모순, 달빛에 눈이 부셔 보이지 않던 앙상한 논리가 제풀에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부동산 정책 의지를 보여준다며 2주택 이상 가진 청와대 비서관급 이상의 아파트를 팔겠다더니 6개월이 지나 현직에 남은 이들 상당수가 여전히 2주택 소유자였다.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은 다시 매도를 촉구했는데 정작 본인은 서울 강남의 ‘똘똘한 한 채’를 움켜쥐었다. 누가 공무원들 집 팔라고 했나. 스스로도 못 지킬 일을 국민에게 강요한 ‘자폭 쇼’가 됐다. 그런 청와대가 집권 초기에 내건 슬로건을 기억하는가. 남에게 봄바람처럼 온화하고 자신에겐 추상같이 엄격하라는 ‘춘풍추상’이었다. 정녕 국민 약 올리려는 계획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국회에서는 상임위를 여당이 독식하고 야당 몫 법사위 관례를 깬 것이 ‘일하는 국회’를 위해서라더니 추경예산 심의는 부처별 평균 25분 만에 처리됐다. 민주당의 야당 시절 법사위원장으로 주가를 올린 한 장관은 “여당 법사위원장이 맞다”고 안면몰수다. 검사 때부터 ‘쓴소리’ 마다치 않던 정치인이 당론을 반대했다고 징계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소신이 설 자리가 없는 정당은 그 자체로 위헌인데도 말이다. ‘민주’라는 간판이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가 아닐 수 없다.

평화와 북한 인권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있는 대북 삐라 문제는 처벌법으로 풀려고 한다. 대다수 국민이 고차방정식임을 아는데 여당만 1차 방정식이라고 단순화한다. 여권 실세 의원은 헌법상 국민인 탈북민을 향해 ‘그 나라 싫어서 나온 사람들’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거여의 폭주는 ‘법의 지배(rule of law)’가 아닌 ‘법을 지배(rule law)’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생각이 다르면 코로나바이러스 격리하듯 함부로 제거하려는 태도는 보름달을 본 늑대인간의 광기와 닮았다. 오죽하면 문 대통령의 성공을 바란다는 노무현 정부의 홍보수석이 “지지도가 높으면 정책적 실수에 대해 관대하게 되고 참모들도 해이해져서 다 잘하고 있는 거로 착각할 수 있다”고 했겠는가. “교육은 포기했고, 부동산 정책은 중간이라도 가면 좋겠다”는 쓴소리는 뼈아플 것이다.

이런 와중에 “근본적이고 체계적인 대책을 당이 신속히 마련하겠다”는 이 대표의 사과는 달밤의 잠꼬대 같다. 대선 이전부터 준비한 ‘근본과 체계’가 흔들렸는데 ‘신속’이 웬 말인가. 달이 기우는 지금, 있는 그대로를 고백하는 게 먼저다. 실력이 부족해도 솔직해야 달빛이 사라진 이후에도 중간은 갈 수 있을 테니.

김승현 정치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