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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오! 마이 갓” 남편이 마련해둔 시골 빈집 보니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34) 

사실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일정이지만 큰맘 먹고 나섰다. 내 귀의 이어폰에서는 돈맥클린의 노래 ‘빈센트’가 흐른다. 밤기차에서 들으니 노래가 더 잘 스민다.[사진 pxhere]

사실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일정이지만 큰맘 먹고 나섰다. 내 귀의 이어폰에서는 돈맥클린의 노래 ‘빈센트’가 흐른다. 밤기차에서 들으니 노래가 더 잘 스민다.[사진 pxhere]

용산역에서 열차에 올랐다. 무궁화호 열차 참 오랜만이다. 내가 내릴 정착지는 임실역. 남편은 최근 그곳에 빈집과 작은 밭을 임대했고 전날 새벽에 먼저 내려갔다. 나는 오늘 따로 예정됐던 일을 마치고 하루 늦게 밤 기차에 올랐다. 이번 지방행은 내게는 사실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일정이지만 큰맘 먹고 나섰다. 내 귀의 이어폰에서는 지금 돈 매클린의 노래 ‘빈센트’가 흐른다. 밤 기차에서 들으니 노래가 더 잘 스민다.

별이 총총한 밤
파란색과 회색을 팔레트에 칠해요
여름날 밖을 바라보아요
내 영혼에 있는 어둠을 알고 있는 눈으로
언덕 위 그림자들
나무와 수선화를 스케치해요
미풍과 겨울의 한기도 그리세요
새하얀 캔버스에 색을 입혀서
이제는 이해해요
당신이 내게 하려고 했던 말이 무엇인지
당신은 온전한 정신을 위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그리고 그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밤 기차와 제법 잘 어울리는 음악이다. 나는 빈센트처럼 열차 차창을 원고지 삼아 뭔가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다. 내가 타고 달리는 무궁화호 열차를, 나는 인공위성이 되어 우주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상상을 해본다. 깊은 밤, 깍두기처럼 생긴 손톱만한 창을 여러 개 달고 달리는 장난감 열차 하나. 그 안에 내가 있다. 작은 애벌레만 한 미니 기차가 나를 태우고 ‘그래도 달려보겠다고…’ 눈곱만큼씩 꼬물거리며 어딘가로 기어간다.

우리 인생을 까마득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아마도 이런 그림이 아닐까. 서로의 작은 손바닥 안에서 빙빙 돌다 어느 순간 삭제되는 것. 아침에 서둘러 현관을 나서며 ‘다녀올게, 오늘은 늦지 않을 거야’ 하고 바삐 나간 사람이 영영 돌아오지 못하기도 하는 이 세상 아니던가. 나는 남편과 심하게 다툰 날은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먼저 손 내밀고 화해를 청하곤 한다. 한발만 물러서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로 우린 종종 서로를 아프게 한다. 돌아보면 우린 너무 사소한 것에 목숨 걸고 싸우기도 한다.

남편이 내게 보여주기 위해 혼자 서성이고 있을 허름한 빈집에 한 뼘씩 가까워지는 상상을 한다. 불과 어제까지도 한 집에서 부대끼며 살던 한 남자를, 나는 굳이 또 왜 그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고 있는 걸까? 중년도 한참 식은 중년 부부인데,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임실에 기껏 가봐야, 땡볕에 밭고랑 사이로 드나들며 남편이 내게, 내가 남편에게, 서로 잔소리만 잔뜩 늘어놓을 것이 빤하다. 그런 잔소리를 하거나 듣기 위해 네 시간을 달려 그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다니 참 신기한 일이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예전에 어느 드라마 주인공이 이렇게 말했지만, 아니다. (물론 그 대사의 의미는 다르지만) 사랑은 계속 변한다. 사랑의 모양과 성질도 노력에 따라 진화한다. 뜨겁고 강렬했던 사랑은 순식간에 지고 서로 측은하고 가여워 (그 곁에 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같이 사는 사랑도 있다. 사는 동안 싸우고 화해하고 울고 웃던 그 힘으로 다시 손잡고, 남은 삶을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그런 전우애로 뭉쳐진 사랑도 있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산다는 것은 어쩌면 인생의 열차를 타고 서로를 향해 매일 달려가고 좀 더 하나가 되려 애쓰는 과정이 아닐까. [사진 pxhere]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산다는 것은 어쩌면 인생의 열차를 타고 서로를 향해 매일 달려가고 좀 더 하나가 되려 애쓰는 과정이 아닐까. [사진 pxhere]

가족이란, 특히 부부나 자식 간이란 참 묘한 팀이다. 어느 순간, 갑자기 서로의 인생에 끼어들어 서로의 삶을 매일 참견하고 감 놔라 배 놔라 아웅다웅 살아간다. 싸울 때는 세상의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다. 그러다가도 서운한 감정이 다 식기도 전에, 그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음악이나 노을을 보면 남편이나 자식 생각이 물컹 쏟아진다. 무의식중에 내 속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이 바로 가족이다.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산다는 것. 이것은 어쩌면 인생의 열차를 타고 서로를 향해 매일 달려가고 좀 더 하나가 되려 애쓰는 과정이 아닐까.

밤늦은 시간, 낯선 임실역에 내리니 “웰컴 투 임실! 하하하!” 저 멀리서 남편이 환하게 나를 반긴다. 온종일 일한 피곤한 몸으로, 이 먼 곳까지 꾸역꾸역 달려와 준 내가 내심 고마운 눈치다. 그래 봤자 머무는 동안 잔소리만 늘어놓을 나다. 그런데도 관절에 힘 빠지고 인생의 전쟁터에서 혹사했던 송곳니도 힘을 잃고 같이 늙어가는 부부란, 설렘 말고도 서로에게 중독될 요소들이 참 많은가보다.

낯선 이 산속에서 먼저 도착한 한 사람이 나중에 도착한 한 사람을 위해 청소를 한다. 남편의 배려일 것이다. [사진 pxhere]

낯선 이 산속에서 먼저 도착한 한 사람이 나중에 도착한 한 사람을 위해 청소를 한다. 남편의 배려일 것이다. [사진 pxhere]

“오! 마이갓!” 남편을 따라 들어간 빈집은 그야말로 현존하는 곤충도감, 죽은 벌레들의 창고였다. 창틀은 죽은 말벌과 각종 날벌레의 무덤이었고, 잡풀이 우거진 마당에는 공룡처럼 뼈가 드러난 죽은 참새도 여럿 있고, 커다란 뱀 허물도 있고, 오래전 인적이 떠난 세면장에는 죽은 새끼 쥐의 검은 사체가 육포처럼 말라 있다. 혼자였다면 밤도 늦었으니 대충 밀쳐두고 말았을 남편이, 내가 쉴 공간을 마련해 주겠다고 한밤중에 빗자루와 마포 걸레를 들고 분주하다. 지구촌 한 귀퉁이, 사방이 어둠뿐인 낯선 이 산속에서 먼저 도착한 한 사람이 나중에 도착한 한 사람을 위해 청소를 한다. 남편의 배려일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매일 너에게로 향해간다. 그것이 마음이든, 행동이든. 그러다 어느 날 저 하늘이 부르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우리는 서로에게서 순간 삭제될 것이다. 서로 살아 있을 때 좀 더 잘해야겠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조금은 오버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우와, 여보! 이 집 정말 괜찮은데? 겉은 이래도 잘만 치우고 손질하면 쓸 만하겠어.”

상대를 향한 응원에는 언제나 돈이 들지 않아 좋다. 우리는 그렇게 주말 내내 땡볕에 풀 뽑고 벌레 치우느라 초주검이 된 후, 딸아이가 기다리는 일상으로 바삐 돌아왔다. 우리는 이렇게 매일 너에게로 가고 있었다.

시인·소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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