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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인국공 사태…이벤트 정치의 허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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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3호 31면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대학평가원장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대학평가원장

“군주가 나라를 망치는 건 악의가 아니라 물정 모르는 의욕만 넘치는 열정과 선의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한비자)

인국공 정규직 전환 이벤트한 정부 #좋은 일자리 만들기 해법 오해한 것 #공정경쟁만으로 일자리 창출 안 돼 #‘연대경제’ 등 새 시대 가치 찾아야

인천국제공항공사(인국공) 비정규직 보안검색요원의 정규직 전환을 둘러싼 갈등은 이미 ‘사태’로 불린다. 이런 ‘사태’에 청와대와 정부가 꾸준히 내놓는 메시지는 ‘선의’다. 선의를 오해해 벌어진 일이라는 답답한 속내도 감추지 않는다.

“본질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 “양극화 해소를 위해 비정규직을 줄이는 건 당면 과제” “나쁜 일자리를 좋은 일자리로 만들고 사회적 불평등을 개선해 공정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

문재인 정부는 청년 일자리에 관한 한 언제나 선의는 넘쳤다. 어쩌면 선의만 넘친 게 문제인지 모른다. 대선 당시 ‘비정규직 제로’ 공약은 청년층의 강한 지지를 끌어냈다. 문 정권은 그동안 이번 인국공을 비롯해 공공부문의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이벤트’를 몇 차례 벌였다. 이것이 공약을 이행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한데 오해는 애당초 정권이 한 것 같다. ‘비정규직 제로’에 대한 기대감은 청년이 일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라는 요구였는데 그저 따뜻한 선의와 격려로 청년들의 눈을 가릴 수 있다고 착각한 거라는 말이다. 정부 출범 이래 매년 발표한 새로운 청년 일자리는 수적으로는 화려했다. 최근 정부는 청년층 일자리 70만~80만 개를 새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청년층 경력개발에 도움이 되는 공공분야 비대면 디지털 일자리 10만 개, 민간 분야 청년 디지털 일자리 5만 개, 청년 일 경험 일자리 5만 개, 직접 일자리 55만 개+α(알파) 등.

문제는 그 화려한 숫자의 일자리는 어디서 찾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학교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한국공항공사 공항서비스직원들의 정규직 전환, 이번 인국공 정규직 전환까지 짬짬이 벌이는 이벤트로 ‘비정규직제로 공약’을 잊지 않고 있다는 성의를 보였다. 이번 인국공 사태에 “이 또한 문재인 정권의 쇼타임(show time)”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건 이젠 ‘이벤트 정치’ ‘쇼맨십 정치’를 웬만한 사람들은 다 눈치챘다는 뜻이다. 실속 없이 화려한 무대 뒤편의 씁쓸함을 이미 경험했기에 더는 통하지 않게 된 거다.

“이번 논란으로 청년들의 절박함을 마주하게 됐다. 모든 세대의 아픔에 공감하는 정부가 되도록 힘쓰겠다.”

선데이칼럼 7/4

선데이칼럼 7/4

청와대 측의 멘트는 답이 아니다. 청년 일자리 문제는 아픔에 공감을 받고 못 받고 하는 감성적 문제가 아니다. 미래와 생존의 문제다. 문제를 해결하고 실력을 보이라는 말이지 함께 울어달라는 말이 아니라는 거다.

사실 이번 청년들의 반응도 ‘의외의 측면’이 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가장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게 공정하다는 최소극대화의 원칙, 즉 이론적으로는 공정성의 정의에 합당하다. 그런데도 ‘무분별한 정규직 전환…’ 등의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역차별 논란을 벌인다. 여기서 다른 청년들의 행운에 축하하는 척이라고 하는 체면치레 조차도 사치가 되어버린 우리 청년들의 현실을 보아야 한다.

“자본주의의 본질적 결함은 혜택의 불평등 분배에 있으며, 사회주의의 고유한 미덕은 고통의 평등 분배에 있다.” 문득 윈스턴 처칠의 이 경구가 떠올랐다. 혜택의 불평등 분배는 우리 사회 고질적 문제이니 재론할 필요도 없고, 문제는 고통의 불평등 분배도 심화하고 있다는 것. 따지고 보면 인국공 청원경찰도 ‘을’이다. 전형적인 을끼리의 갈등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을의 고통도 참을 수 없는 지경인데, 그 고통이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현실 앞에서 ‘이론적 정의 같은 건 개나 줘버려’하는 마음이 들지 않기를 바라는 게 더 힘든 요구다.

도대체 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공정한 경쟁의 기회’. 이번 인국공 사태를 보며 의아했던 건 청년들이 ‘경쟁’의 가치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나는 우리 사회 고통의 근원은 ‘경쟁’에 대한 지나친 믿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도대체 실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떻게 경쟁해야, 또 그 결과가 어때야 공정한 것인가. 한국인은 우수해서 웬만한 일은 누가 맡아도 평균 이상은 해내는데 ‘그는 되고, 나는 안 되는’ 상황을 어떻게 인정하라는 말인가.

우리는 왜 ‘경쟁’만 말하고 ‘협력과 연대’에 대해선 말하지 않을까. “약자들은 경쟁이 아닌 연대를 통해서만 자신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 이는 커피 공정무역을 창시한 보에르스마 신부의 메시지다. 공정무역은 그동안 대기업과 커피 중개상만 배를 불리고 정작 커피를 생산하는 농민들은 빈곤을 대물림하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소규모 커피 상인들과 연대하고, 그리하여 농민이 빈곤에서 벗어난 방식이다. 전체 커피 시장에서 공정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그러나 그 작은 시장만으로도 커피 농부들은 품위 있는 생활을 할 기반을 마련했다. 이처럼 아래로부터 대안을 제시하는 ‘연대의 방식’은 세계 도처에서 실험되고 있다. 찾으면 길은 있다.

문 정부에 바라는 게 있다.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경쟁의 틀 안에서 ‘이벤트’로 무마하려는 정치기술을 포기하고, 새로운 시대 가치를 고민하고 창출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대학평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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