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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집념…일본에 있던 고려 나전합 들고 돌아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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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최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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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일본 소장자의 갤러리에서 처음 본 순간 반했다. 정교한 이음새와 화려한 무늬가 한 치 흐트러짐이 없었다. 한눈에 문화재 보물급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꼭 가져오고 싶었는데 이제야 소원을 이뤘다.”

보물급 나전칠기…세계 3점뿐 #최응천 이사장 끈질긴 협상 쾌거

2일 최응천(61·사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동국대 미술사학과 교수)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고려 나전칠기 공예품 가운데 ‘나전합’은 전 세계 3점뿐. 그 중 일본에 있던 1점이 한국에 돌아와 이날 서울 고궁박물관에서 언론에 공개됐다. 문화재청의 위임을 받은 재단이 80대 일본인 소장자를 상대로 끈질기게 협상해 매입에 성공한 결과다.

학부 때 불교미술(공예)을 전공한 최 이사장은 국립중앙박물관 전시팀장 시절부터 이 문제에 매달렸다. 전 세계에 단 20여점이 전해지는 고려 나전칠기가 한국 문화유산의 높은 수준과 긍지를 보여줄 수 있다는 확신에서다. 그나마 완전한 형태는 15점. 그중 4점이 도쿄박물관에 있다는 걸 알고 2005년 보름 동안 연구 교류를 자청해 일본에 갔다.

이번에 환수한 나전합을 만난 것도 이 무렵 일본 전역의 고려 나전칠기 현황을 조사하면서다. 이를 포함한 10여점을 일본에서 빌려와 이듬해 국립중앙박물관 ‘천년의 빛-나전칠기’전에 선보였다. 우리 나전칠기 역사를 한자리에 모은 전시는 화제가 됐지만 이후 유물을 돌려보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12세기에 제작돼 온전한 형태로는 전 세계 3점만 전해지는 고려 나전합 중 일본에 있던 1점이 우리 품으로 돌아와 2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됐다. [사진 문화재청]

12세기에 제작돼 온전한 형태로는 전 세계 3점만 전해지는 고려 나전합 중 일본에 있던 1점이 우리 품으로 돌아와 2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됐다. [사진 문화재청]

최 이사장은 “당시 온전한 형태의 고려 나전칠기 국내 소장품은 국립중앙박물관의 불자(拂子, 일종의 불교 도구) 1점뿐이었다”며 “특히 이 나전합은 미술관이나 사찰 소장이 아닌 개인 소장이라 구입 가능성이 있었다”고 돌이켰다. 2008년 박물관을 떠나 교수가 된 그는 2012년 출범한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자문위원으로서 이 문제를 계속 얘기했다고 한다.

재단은 2018년 소장자와 협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해 11월 “운명처럼” 그가 이사장으로 부임했다. 다시 만난 소장자는 그에 대한 신뢰로 결단을 내렸다. “고려의 것이니 한국에 돌아가야 한다.” 언제 어떻게 이 땅을 떠났을지 모를 작은 합은 이렇게 올 초 돌아왔다.

정식 명칭은 ‘고려 나전국화넝쿨무늬합’이다. 10㎝ 남짓한 길이에 무게는 불과 50g. 국화 꽃잎과 넝쿨무늬가 함 둘레를 수놓듯 새겨져 있다. 영롱하게 빛나는 전복패, 온화한 색감의 대모(바다거북 등껍질), 금속선을 이용한 치밀한 장식 등 고려 전성기 기법이 고스란히 반영된 수작으로 평가된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이번처럼 온전하고 아름다운 유물이 돌아온 것은 독보적 사례”라고 말했다.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고려 나전국화넝쿨무늬합 공개 행사 장면. [사진 문화재청]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고려 나전국화넝쿨무늬합 공개 행사 장면. [사진 문화재청]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고려 나전국화넝쿨무늬합 공개 행사에서 최응천 국외소재문화재단 이사장(오른쪽)이 돌아온 합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과 정재숙 문화재청장(가운데)도 함께 했다. [사진 문화재청]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고려 나전국화넝쿨무늬합 공개 행사에서 최응천 국외소재문화재단 이사장(오른쪽)이 돌아온 합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과 정재숙 문화재청장(가운데)도 함께 했다. [사진 문화재청]

나전은 자개를 무늬대로 잘라 목심이나 칠면에 박아넣거나 붙이는 칠공예 기법. 특히 고려에서 가장 화려하게 꽃을 피워 불화, 청자와 더불어 3대 미술품으로 꼽힌다. 송나라 사절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극히 정교하고’, ‘솜씨가 세밀하여 가히 귀하다’는 찬사가 전해진다.

고려 나전합은 커다란 원형 합(모자합·母子盒) 속에 5개의 작은 합(자합·子盒)이 들어있는 형태로 가운데 꽃 모양 합을 송엽형 자합 4개가 둘러싼 모습인데 현재 완전체는 전해지지 않는다. 이번에 환수한 나전합은 송엽형 자합 4개 중 하나이자 12세기 제작된 화장용 상자의 일부로 추정된다.1000년 가까운 세월에도 정갈한 이음새 그대로다. 재단의 김동현 유통조사부장은 “일부 미세하게 빠진 부분도 후대의 보수가 없어 고려 기법을 원형대로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로써 국내 온전한 형태의 고려 나전칠기 유물은 보물 1975호 나전경함(불교 경전을 보관하기 위한 함) 등 모두 3점이 됐다. 나전경함은 2014년 국립중앙박물관회가 일본에서 사들여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번에 돌아온 나전합도 이곳에 소장된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올 하반기 특별전 ‘고대의 빛깔, 옻칠’을 통해 국민들께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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