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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블랙 이즈 뷰티풀'…양조장이 소외층을 돕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황지혜의 방구석 맥주여행(46) 

지난 6월 초 미국 텍사스의 맥주 양조장 웨더드 소울즈 브루잉(Weathered Souls Brewing)은 전 세계 양조장을 대상으로 ‘블랙 이즈 뷰티풀(Black is beautiful)’ 운동을 제안했다. 맥주업계가 인종 간 불평등을 타파하기 위한 활동에 힘을 모으자는 것이다. 웨더드 소울즈 브루잉은 자신의 고유 맥주 레시피를 오픈소스로 공개하고 라벨 디자인을 제공했다. 인쇄업자도 이 운동에 동참해 양조장이 라벨을 프린트할 때 할인을 받을 수 있다.

양조장은 이런 자원을 자유롭게 활용해 맥주를 만들고, 해당 맥주로 얻는 수익을 인종 차별 저항 운동을 하는 단체에 기부하면 된다. 6월 말 현재 미국을 비롯해 캐나다, 영국, 베트남 등 전 세계 17개국에서 913개 양조장이 블랙 이즈 뷰티풀 운동에 참여를 선언했다. 한국에서는 제주도의 맥파이 브루잉이 이름을 올렸다.

블랙 이즈 뷰티풀 맥주 라벨. [사진 Black is beautiful 홈페이지]

블랙 이즈 뷰티풀 맥주 라벨. [사진 Black is beautiful 홈페이지]

앞서 4월에는 미국 브루클린의 맥주 양조장 아더하프 브루잉(Other Half Brewing)이 코로나19로 큰 피해를 본 지역사회 서비스업 종사자를 돕자는 취지로 ‘올 투게더 비어(All Together Beer)’ 운동을 런칭했다.

아더하프 브루잉이 제공한 맥주 레시피와 라벨 디자인을 활용해 맥주를 만들고 이를 통해 창출된 수익을 숙박업소, 레스토랑, 카페, 리조트, 놀이공원 등 고객과 직접 마주하면서 영위하는 비즈니스를 돕는 데 기부하는 방식이다. 올 투게더 비어 운동에는 전 세계 53개국 855개 양조장이 참여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서울 마포의 미스터리 브루잉이 올 투게더 비어 제품을 내놨다.

지역별 All together beer 참여 양조장 수. [사진 All together beer 홈페이지]

지역별 All together beer 참여 양조장 수. [사진 All together beer 홈페이지]

이런 수제맥주 업계의 전 세계적인 활동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전에도 위기가 닥칠 때마다 이런 운동이 자발적으로 일어났고, 성공 경험으로 쌓였다. 2018년 시에라 네바다 브루잉(Sierra Nevada Brewing)은 미국 캘리포니아 산불로 큰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기부하기 위해 ‘리질리언스(Resilience)’ 운동을 추진했다.

국내에서도 지난 2월 호주 산불 피해를 돕기 위해 더랜치 브루잉, 맥파이 브루잉, 서울 브루어리, 고릴라 브루잉, 갈매기 브루잉, 칠홉스 브루잉, 버드나무 브루어리, 화이트크로우 브루잉, 대도 브루잉, 서울집시, 브루 소스 인터내셔널 등 맥주 관련 업체가 협력해 ‘도움의 손길(Helping Hands)이라는 맥주를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수제맥주 업계는 국경을 초월해 생각을 공유하고 행동한다. 구속력을 가진 조직이 있는 것도 아닌 데도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수제맥주 양조장은 자국의 전체 맥주 업계에서 ‘마이너’다.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대기업 맥주가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미국을 제외하면 수제맥주가 시장점유율 10% 넘는 나라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다 보니 수제맥주 양조장은 살아남기 위해 기득권 세력인 대기업 위주의 제도, 세제와 싸우고 소비자에게 맥주를 소개하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해야 한다. 세상을 지배하는 세력보다는 소외 받는 계층에 관심을 기울이고 서로 도와야 한다는 무언의 합의가 수제맥주 업계에는 널리 형성돼 있는 이유다.

또한 양조는 국경을 초월하는 언어다. 1병에 10만 원짜리 맥주든 1000원짜리 맥주든 기본적으로 같은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업계에서 언제나 뭉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돼 있는 것이다. 이 덕분에 국내외 양조장은 공동 양조를 수시로 시도한다.

캠페인이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는 점도 전 세계적으로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다. 블랙 이즈 뷰티풀이나 올 투게더 비어 운동에서는 오픈소스 레시피를 제공하되 양조장이 자유롭게 레시피를 변경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양조에 쓰이는 재료도 구하기 쉬운 것으로 제안하는 등 맥주 양조장에게 맥주 생산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수익금의 활용에 대해서도 제한이 없다. 수익금을 특정 활동에 기부하자는 취지로 시작하지만 이에 강제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미스터리브루잉 All together beer. [사진 미스터리브루잉 페이스북]

미스터리브루잉 All together beer. [사진 미스터리브루잉 페이스북]

이 때문에 양조장의 연대가 과연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하지만 전 세계 양조장의 협력 효과가 단순히 얼마를 기부했느냐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양조장이 모두 하나의 생각을 전달하는 거점이 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양조장 내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지역사회에 어려운 집단에 관심을 갖게 되고 유색인종 채용에 신경을 쓸 것이다.

또 양조장 하나하나가 캠페인의 거점이 된다. 미국에만 8000개가 넘는 맥주 양조장이 있고. 한국에도 130여개를 헤아린다. 이들의 맥주를 마시는 수많은 사람이 상상 이상의 파급력을 발휘하게 된다. 맥주 대기업이 단독으로 하는 캠페인과는 차원이 다르다. 수제맥주 업계의 운동은 만드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인식을 확산시킨다.

수제맥주 업계의 작은 움직임이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팬데믹을 해결하거나, 수백 년을 지속해 온 인종차별 문제를 한순간에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마시는 맥주가 어떤 식으로든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점이 맥주를 주문하는 목소리에 힘을 보탠다.

비플랫 대표·비어포스트 객원에디터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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