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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박능후 해보자는데…심의 전날 남인순에 막힌 화상투약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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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의 반대로 원격의료 도입이 막혀있는 가운데 이번엔 약사들의 반발로 비대면 '화상 투약기'가 규제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특히 화상 투약기 도입을 논의하기로 했던 정부의 ICT 규제 샌드박스 심의위원회(제10차 신기술‧서비스 심의위원회)가 대한약사회와 여당 의원의 반대로 심의 하루 전 안건 상정을 취소한 것으로 확인됐다. 화상투약기는 심야나 공휴일에 약사가 화상통화로 환자의 상태를 살핀 뒤 원격으로 약을 떨어뜨려 주는 약 판매기이다.

규제심의위 하루 전 갑자기 안건 취소  

IT업체인 쓰리알코리아의 박인술 대표는 1일 "화상 투약기에 대한 실증 특례 여부를 논의하기로 했던 규제 샌드박스 심의위가 심의를 하루 앞둔 지난달 29일 저녁에 안건을 취소했다고 통보해왔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8년 전 화상 투약기를 개발했지만 비대면 판매를 금지한다는 보건복지부의 유권해석에 막혀 제품을 출시하지 못하고 개점휴업 상태에 빠져있다.

박 대표는 이후 정부의 ICT 규제 샌드박스에 기대를 걸고 9억원을 더 투자해 신제품을 만들어 지난해 5월 심의위에 실증 특례를 신청했다. 박 대표는 "마침내 지난달 26일 정보통신산업진흥원에서 10차 심의위에 안건으로 상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참석자 명단까지 제출했지만 하루 전 안건 취소 통보를 받은 것"이라며 허탈해했다.

박능후 "검증해 보자 남인순 "사전 설명 부족해"   

ICT 규제 샌드박스 심의위의 안팎에 따르면 화상 투약기의 안건 취소는 지난달 29일 국회에서 열린 보건복지위원회 전체회의가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화상 투약기에 대해) 시범사업이나 특례규정, 폐해 등에 대해 검증해보고 싶은 게 복지부의 입장”이라며 시행 의지를 피력했다.

하지만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화상 투약기는)지난 19~20대 국회에서 이미 반대한 사안”이라며 “오히려 노인이나 장애인, 어린이의 접근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했다. ICT 규제 샌드박스 관계자는 “복지부가 논쟁적인 사안을 상정하는 것이 부담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통해 상정을 미룬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남인순 의원 측은 “법제처에서 법 개정 후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는 판단이 있는 사안에 대해 입법부에 충분한 사전 설명이 없었다”며 “약사회의 이해관계를 떠나 당장 공적 마스크 등으로 협력해야 할 대상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안건을 논의하는 것도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약사회, "화상투약기 허용하면 대 정부 투쟁"

규제샌드박스의 화상투약기 안건 취소에는 약사회의 반발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약사회는 1일에도 입장문을 내고 “대한약사회와 전국 16개 시도지부는 실증 특례를 통한 영리 기업 자본의 의약품 판매업 진출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한다"며 "(정부가) 일방통행식의 정책 추진 시 대대적인 대정부 투쟁에 돌입할 것을 결의한다”고 규탄했다. 최헌수 약사회 실장은 “규제샌드박스로 통과돼 일단 사업이 시작되면 당장의 편의성에 묻혀 건강권을 위협하게 될 것”이라며 “국민의 건강권이 IT 산업 발전을 위한 도구가 돼선 안 된다”고 말했다.

화상투약기 개발해놓고 8년째 개점휴업 

쓰리알코리아의 화상투약기 내부 모습. 김경진 기자

쓰리알코리아의 화상투약기 내부 모습. 김경진 기자

쓰리알코리아는 이미 지난 2013년 화상투약기에 대한 특허를 받은 인천 부평의 한 약국에 화상투약기를 설치했다가 약사회의 반대와 복지부의 유권해석으로 사업을 철회한 바 있다. 당시 복지부는 "약사법의 입법취지상 대면 규정 위반"이라며 불가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비대면 원격 의료의 효용성이 높아지면서 화상 투약기에 대한 도입 논의가 다시 시작됐다. 박 대표는 “환자가 약사와 직접 대면하지 않고 약을 받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또 "약사가 환자에게 판매한 약에 대한 자료가 모두 저장되기 때문에 오남용 우려도 없고 책임 소재 규명도 분명해진다”고 말했다.

규제 샌드박스 취지에 어긋난단 지적도  

약사회와 여당 의원의 반대로 규제샌드박스 안건에서 취소된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문형남 숙명여자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선진국과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의료와 의약 분야에서 비대면 기술 적용이 많이 뒤처져 있다”며 “이해관계로 인해 도입이 어려운 신기술에 대해 일정 테두리 안에서 자유롭게 기술을 테스트해보라는 것이 규제 샌드박스의 취지인 만큼 기술을 테스트할 기회를 준 뒤 대안이나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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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 기자 kjin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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