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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미친 시대’를 견디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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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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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입식 교육 덕분에 몽테뉴라는 유럽인이 『수상록』이라는 책을 냈고 그 안에 실린 글들이 수필의 효시(嚆矢)가 됐다는 단편적 상식은 있었는데, 그것이 그와 그 책에 대해 아는 것의 전부였다. 그러다 지난달 29일 뉴욕타임스의 한 칼럼(‘Montaigne fled the plague, and found himself’)으로 인해 그와 그의 책을 죽은 지식의 무덤에서 꺼내게 됐다. 미국 휴스턴대 로버트 자렛스키 교수는 몽테뉴가 흑사병(페스트)이 퍼지자 자신이 맡고 있던 보르도 시장직의 임기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가족과 함께 시골로 피신했다고 적었다. 그 도피는 한편으론 끔찍한 종교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전염병·내전을 관통한 몽테뉴 #“화내지 말고 웃으며 경멸하라” #“펜대에 피 말고 잉크를 적셔라”

몽테뉴는 1585년부터 약 2년 동안 여러 곳을 전전하며 피난생활을 했다. 그때 수상록 3권을 썼고, 전에 출판한 1권과 2권을 수정했다. 당시 흑사병으로 보르도에서 주민 3분의 1에 해당하는 1만4000여 명이 숨졌다. 프랑스는 신교(칼뱅파)와 구교(가톨릭)의 내전에 휩싸여 있기도 했다. 신념의 전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헤게모니 쟁탈전이었다. 몽테뉴는 구교도였는데 신·구교 충돌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수상록』에는 피폐해진 세상에 대한 달관(達觀)과 허무(虛無)의 태도가 곳곳에 배어 있는데, 서문 끝은 이렇다. ‘이 책을 읽는 이여, 여기서는 나 자신이 바로 내 책의 재료다. 이렇게도 경박하고 헛된 일이니 그대가 한가한 시간을 허비할 거리도 못 될 것이다. 그러면 안녕.’

전염병과 헤게모니 투쟁의 힘겹고 거친 시대를 먼저 겪은 몽테뉴는 책으로 우리에게 ‘정신적 처방전’을 남겼다. ‘웃는 것이 우는 것보다 더 유쾌해서가 아니라 그 편이 더 경멸적이기 때문이다.’ ‘디오게네스는 술통을 굴리고 혼자서 어슬렁대며 알렉산드로스를 코웃음쳤고, 인간들을 바람이 가득 찬 오줌보로 보고 있었으니, 그는 내가 보기에는 인간의 증오자라는 별명을 가진 티몬보다도 한층 더 신랄하고 예리했으며, 한층 더 공정한 심판자였다.’ 요즘 뉴스를 읽으며 개탄하거나 화를 내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복수심에 사로잡힌 자들의 횡포를 향해선 이렇게 썼다. ‘마음속의 앙심과 원한을 의무라고 불러서는 안 되며, 악의와 배신에 찬 행위를 용기라고 불러서도 안 된다. 그들은 악의와 폭력으로 향하는 마음을 열성이라고 부른다.’ ‘악의는 그 자체의 독을 대부분 들이마시고 제 독에 중독된다. 악덕은 몸의 종기와 같이 영혼에 상처를 남긴다.’ 허황한 말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를 겨냥해선 이런 경멸의 문구를 던졌다. ‘어리석은 자와 성실하게 토론하기는 불가능하다. 밀어붙이기식으로 벅차게 나오는 자의 손에 걸리면 내 판단력뿐 아니라 양심마저 썩어버린다. (중략) 플라톤은 그의 국가론에서 무능한 소질의 어리석은 자로 태어난 자들에게는 논변 훈련을 금지한다.’

그가 제시한 고통의 시대를 견뎌내는 ‘정신 승리법’은 이렇다. ‘어리석은 자들이 현자에게서 배우는 것보다도 현자들이 어리석은 자에게서 더 많이 배운다. 한 늙은 음악가는 제자들에게 바로 앞집에 사는 못난 악사의 연주를 강제로 듣도록 해 부조화음과 틀린 박자를 식별할 줄 알게 길들였다.’ ‘우리는 칼날을 가지고 우리의 용기를 강화시켜도 소용이 없다. 우리의 어깨가 단단하면 그만이다. 우리의 펜대를 잉크에 적시면 그만이고, 피에 적실 것까지는 없다.’

끝을 알 수 없는 전염병 세상에 미개했던 과거의 유물로만 생각했던 의회 1당 지배 폭거까지 덮쳤다. 권력 주변인들의 저질 발언과 궤변이 지겹게 펼쳐진다. 우울감과 분노를 억누르기 어렵다는 이가 도처에 있다. 프랑스 사상가 자크 아탈리는 당장의 즐거움만 좇는 현대인을 향해 “우리는 웃다가 죽을 것이다”고 경고했지만 지금 한국에는 “화가 나서 못 살겠다”는 사람이 많다. 그런 이들에게 500년 전에 작성된 몽테뉴의 처방을 전한다.

이상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