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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문화난장

6·25 70돌, 문화재 수호신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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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코로나19로 꽁꽁 문이 닫힌 프로야구 경기장이 곧 열린다. 이르면 이번 주말, 아니면 다음 주부터 관중 입장이 제한적으로 허용된다. 야구팬에겐 단비 같은 소식이다. 한국 문화재의 수호신인 간송(澗松) 전형필(1906~62)도 야구선수 출신이다. 서울 휘문고보 시절 무관인 아버지의 권유로 체육부에 들어가 야구를 했다.

보물 5000점 지킨 전형필 #송악산 작전 펼친 손세기 #박물관에 목숨 건 김재원 #전쟁의 아픔 돌아보게 돼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간송은 뛰어난 야구선수였다. 그의 손자 전인건 간송미술관장은 “할아버지는 휘문고보 야구부에서 3번 타자 1루수였다. 1923년 일본 고교야구 최고 대회인 고시엔(甲子園)에서 조선 대표 최초로 8강까지 진출했다. 이듬해 주장을 맡아 오사카 원정도 다녀왔다”고 말했다. 서지학자 김영복씨는 “가산을 털어 문화재를 지킨 간송의 결단력 밑바탕에는 스포츠맨의 승부사 기질이 깔려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 간송이었건만 70년 전 한국전쟁은 중과부적이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간송은 가족들을 외가로 피신시키고 미술품 수장고인 보화각에서 멀지 않은 빈집에 몸을 숨겼다. 이충렬 작가의 전기 『간송 전형필』에 따르면 간송은 아침저녁으로 보화각이 보이는 곳에 가서 동태를 살폈다. 그때 간송은 국립박물관을 지키던 최순우와 고서화 수집가 손재형의 큰 도움을 받았다. “보화각 골동품을 잘 포장하라”는 인민군 책임자의 명령에도 최순우와 손재형은 온갖 핑계를 대며 포장 작업을 늦추고 또 늦췄다. 이후 연합군의 9·28 서울 수복 당시 인민군은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국립중앙박물관 ‘6·25 전쟁과 국립박물관’ 전시회에 나온 통일신라 시대 선림원지범종. 오대산 월정사에 있었으나 전쟁의 화염 속에 녹아내렸다. [연합뉴스]

국립중앙박물관 ‘6·25 전쟁과 국립박물관’ 전시회에 나온 통일신라 시대 선림원지범종. 오대산 월정사에 있었으나 전쟁의 화염 속에 녹아내렸다. [연합뉴스]

인민군이 재차 남하하자 간송도 비상 대책을 세웠다. 11월 중순 주요 수장품을 기차에 싣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수만 권 책과 웬만한 서화·도자기까진 가져갈 수 없었다. 당시 보화각도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피난지 부산에 간송이 아끼던 물건이 돌아다닐 정도였다. 그는 “(서울에 돌아오니) 청계천변 노점에도 내 장서가 나타나고, 고물상 탁자에도 나의 애장본이 꽂혀 있었다”고 한탄했다. 그래도 간송의 곡진한 노력 덕분에 5000여 점에 이르는 보물이 살아남을 수 있게 됐다. 최근 간송미술관 불상 두 점이 처음 경매와 나와 유찰되는 수난이 있었지만 말이다.

간송과 대놓고 견주기는 그렇지만 한국전쟁 관련 문화재 수호작전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일화가 하나 더 있다. 이번엔 6·25 발발 이태 전 일이다. 개성 출신 실업가 손세기(1903~83)는 공산정권의 압박을 피해 어느 날 밤 급하게 개성 송악산 자락에서 남쪽으로 탈출한다. 준비가 부족한 탓에 그간 수집해온 고려청자·고서화를 챙길 수 없었다. 당시 남과 북은 38선 부근에서 티격태격 국지전을 벌이고 있었다.

1924년 휘문고보 야구선수 시절의 간송. 『간송 전형필』(김영사)에서.

1924년 휘문고보 야구선수 시절의 간송. 『간송 전형필』(김영사)에서.

손씨는 남한의 개성 주둔군 부대장을 찾아 골동품을 되찾아올 특공대 조직을 제안했다. 부대원 부식비로 엄청난 거액을 내놓았다. 특공대는 그가 그려준 지도를 따라 송악산 비밀창고를 찾아내고, 자칫 잃을 뻔한 고미술품 구출 작전에 성공했다. 손씨는 고희(古稀)를 맞은 73년에 목숨을 걸고 수집한 문화재 209점을 서강대박물관에 쾌척했다. 그의 아들 손창근(91)씨도 2년 전 문화재 304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대를 이은 문화재 기증’이란 점에서 화제가 됐다.

요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6·25 전쟁과 국립박물관-지키고 이어가다’(9월 13일까지)가 열리고 있다. 코로나19 탓에 온라인과 유튜브로 먼저 공개됐다. 한국전쟁이란 절박한 상황에서 우리 유물을 지키려는 박물관 관계자들의 악전고투를 돌아보게 한다. 김재원 초대 국립박물관장은 미국 공보원장 유진 크네즈의 도움을 받아 부산행 열차를 수배하고, 소장 유물 2만여 점을 안전하게 대피시켰다. 북한군의 서울 점령 당시 “고려자기를 포장했다. 크기를 재지 않았다, 회화는 습기가 안 돌도록 싸야 한다, 불상은 머리 부분이 약하다 등등의 이유를 들어 3일간에 겨우 5개의 포장을 마쳤다. 생명을 건 싸움이었다”는 김 관장의 회고가 뭉클하다.

이번 전시는 아쉬움도 남긴다. 국립박물관 자체 얘기에 집중하고, 전시 공간이 작다 보니 1954년 부산 판자촌 화재사건으로 소실된 수천 점의 궁중유물, 형태를 모를 만큼 타거나 그을린 조선 왕들의 어진(御眞·초상화) 등 전쟁이 남긴 상처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룬 느낌이다. 모든 게 그렇듯 문화재도 명과 암을 고루 볼 때 전체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우리 문화재 전반을 살펴보는 곳이 아닌가.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