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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쪼그라든 해외자원개발…에너지 안보가 흔들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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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권혁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기로에 선 자원 정책

권혁주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에너지 안보가 흔들린다. 해외자원개발을 통한 에너지 자립도가 떨어지고 있다. 1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석유·가스 자원개발률은 2015년 15.5%에서 지난해 13.3%로 하락했다. 애초 목표(2010년 4차 해외자원개발 기본계획)였던 ‘2019년 30%’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한다. 그나마 2018년 12.5%에서 소폭 회복한 게 이 정도다.

자립 척도인 에너지 자원개발률 #2019년 목표 30%, 실제론 13.3% #박근혜 정부, 개발 지원 대폭 축소 #에너지 자립도는 갈수록 떨어져

자원개발률이란 우리가 확보한 해외 유전·가스전에서 생산하는 양이 전체 수입량의 몇%를 차지하는지 보여주는 수치다. 일종의 ‘에너지 안보’ ‘에너지 독립’ 지표다. 한때는 ‘자주개발률’이라 불렀다. 한국과 반대로 일본은 2014년 22.1%이던 자원개발률이 2018년 29.4%로 늘었다. 일본은 2030년까지 자원개발률을 40%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한국은 석유·가스의 95%를 수입하는 나라다. 미국과 이란 간 갈등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 에너지 조달에 애를 태우기도 했다. 과거부터 정부가 해외자원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다. 그런데도 이제는 에너지 자립도가 거꾸로 가고 있다. 이유는 두 가지다. 공기업의 투자 실패와 정부의 정책 의지 실종이다.

투자 실패에 석유공사 부채비율 3000%

LG상사가 개발한 베트남 롱도이 가스전. 성공사례로 꼽히는 소형 가스전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해외자원개발에 실패했다. 이젠 해외자원개발 자체가 쇠퇴했다. [중앙포토]

LG상사가 개발한 베트남 롱도이 가스전. 성공사례로 꼽히는 소형 가스전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해외자원개발에 실패했다. 이젠 해외자원개발 자체가 쇠퇴했다. [중앙포토]

해외자원개발을 체계적으로 추진한 건 김대중 정부 때부터였다. 10년간 추진 방향을 설정하는 ‘해외자원개발 기본계획’을 처음 만들었다.

이명박 정부는 특히 이를 강력히 추진했다. 자원보유국과 협력하는 ‘자원 외교’를 전면에 내세웠고, 한국석유공사 같은 공기업에 거액의 자본금을 투입해서는 해외 석유·가스와 각종 광물 확보에 나서게 했다. 유전·가스전을 확보하면 국내 업체가 생산 시설을 짓는 등 수출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였던 부작용일까.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직접 원인은 국제유가다. 국내 공기업들이 해외에서 활발히 유전·가스전을 탐사·개발하고 인수하던 2010년 전후로 국제유가는 연평균 배럴 당 100달러를 오르내렸다. 그래도 더 오를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35년에는 배럴 당 145달러까지 오를 것”이라고 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전·가스전이 엄청난 고가에 거래된 배경이다. 하지만 예상이 빗나갔다. 미국에서 셰일가스가 뿜어져 나오면서 유가가 곤두박질쳤다. 2013년 평균 99달러였던 서부텍사스유(WTI) 가격은 이듬해 53달러로 거의 반토막 났다.

그 뒤론 상대적 저유가가 이어지고 있다. 큰돈 들여 유전·가스전을 사들였던 기업들은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 이자 갚기에도 허덕였다. 신규 투자는 언감생심이었다. 한국가스공사는 2013년 이후 해외자원개발이 단 한 건도 없다. 현금이 급하다 보니 확보한 유전·가스전을 헐값에 내놓는 일마저 벌어졌다. 그래도 빚이 쌓였다. 석유공사의 부채비율은 지난해 말 무려 3000%에 이르렀다.

박근혜 정부는 해외자원개발을 이끈 공기업 사장들을 고발했다. 해외 광구를 지나치게 비싸게 인수해 손해를 끼쳤다는 죄목이었다. 이른바 ‘자원개발 비리’다. 만고의 충신이 될 것 같았던 해외 자원개발은 그렇게 졸지에 역적으로 몰렸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김신종 한국광물공사 사장은 1·2심과 대법원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강영원 석유공사 사장 역시 1·2심 무죄였고, 현재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경영 판단을 잘못한 것은 맞지만, 배임죄를 물을 수는 없다”는 게 판결 취지였다. 주강수 가스공사 사장은 아예 검찰에서 무혐의 처리됐다.

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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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는 해외 자원개발 사업 자체를 대폭 축소했다. 민간 기업에 주던 해외자원개발 융자 예산을 크게 줄였다. 2010년 3100억원이던 예산이 2016년에는 한 푼도 없었다(2017년에는 다시 1000억원). 융자 예산 축소는 문재인 정부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금은 수백억 원 선이다. 해외자원개발 투자에 부여하던 각종 세금 혜택도 깡그리 사라졌다. 결과는 민간 기업들의 해외 자원개발 위축이다. 공기업은 광구를 팔아치우는 마당에 벌어진 일이다. 한국의 자원개발률이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다. 업계에서는 “박근혜 정부가 자원개발 비리를 들어낸 게 아니라 자원개발 전체를 들어냈다”는 말이 나왔다.

일각에서는 “이젠 여건이 바뀌어 석유·가스 자원개발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왔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셰일가스 덕에 공급이 넘치고, 에너지 전환으로 인해 앞으로는 석유·가스 의존도가 더 떨어진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아직은 반대 논리가 우세하다. 2040년까지는 여전히 전 세계 에너지 수요의 절반 이상을 석유·가스가 차지할 것으로 국제기구는 내다보고 있다. 또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지나면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에너지 수요가 꾸준히 증가할 것이어서, 공급이 넘치는 상황이 이어지리라 장담하기도 어렵다. 더구나 에너지 전환을 추진하는 한국은 앞으로 가스 소비가 급증할 것이 유력하다. 태양광·풍력 발전소에서 전력이 끊길 때에 대비해 가스 발전소를 덩달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석탄발전소를 줄이고 대신 LNG 발전소 24기를 짓는다는 계획도 세워 놓고 있다.

2025년부터 국제유가 상승 사이클 가능성

다시 자원개발에 나선다면 지금이 호기일 수 있다. 유가가 떨어져 유전·가스전을 상대적으로 싼 가격에 인수할 길이 열렸다. 2025년이면 다시 수요가 공급을 추월해 유가가 오르리라는 분석도 나온다. 인하대 자원공학과 신현돈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유가가 오르면 새 광구를 많이 개발한다. 그래서 10년쯤 지나면 공급이 넘쳐 다시 유가가 떨어진다. 그러면 반대로 신규 광구 개발이 사라진다. 그렇게 10년쯤 지나면 다시 수요가 공급을 초과해 유가가 오른다. 대략 10년 주기 사이클이다. 지금 저유가는 2014년 시작됐으니 2025년을 전후해 공급이 달리는 상황이 올 수 있다.”

현재는 해외자원개발 투자가 쉽지 않다. 국내 공기업·민간기업 모두 여력이 없다. 공기업은 빚에 시달려 구조조정에 여념이 없고, 코로나19로 유가가 떨어지는 바람에 민간 에너지기업들은 올 1분기에 막대한 손실을 봤다. 정부 또한 코로나19에 대처하느라 엄청난 재정 적자를 감수하는 상황이다.

어찌 됐든 에너지 안보는 정부·공기업의 몫이다. 기회를 살릴 전략이 시급하다. 한양대 자원환경공학과 김진수 교수는 “과거 실패를 통해 우리는 아주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자원개발 관련 역량을 얻었다”라며 “이런 역량을 활용하지 못하는 상황이 앞으로도 몇 년 이어지면 아예 역량 자체가 묻혀버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21세기 발견한 것 중 최대’ 모잠비크 가스전

해외 자원개발이 실패만으로 점철된 것은 아니다. 간간이 성공 사례도 터졌다. 모잠비크 해상광구가 대표적이다. 한국가스공사가 지분 10%를 투자한 이곳에서는 국내 액화천연가스(LNG) 23년 도입량에 해당하는 가스가 발견됐다. 21세기 들어 찾아낸 가스전 중에 제일 크다. 생산은 2022년 시작한다.

한국석유공사와 GS에너지가 지분 40%를 가진 아랍에미리트(UAE) 할리바 유전은 애초 원유 1억8000만 배럴이 묻혀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지분 확보 뒤 탐사에서 11억 배럴을 찾아냈다. 석유공사에 따르면 이 중 약 20~30%를 뽑아낼 수 있다. 현재 하루 4만 배럴가량을 생산한다. 국내 1일 원유 수입량의 약 1.5%다. 성공신화의 고전은 미얀마 가스전이다. 2000년 포스코인터내셔널(옛 대우인터내셔널)이 일찌감치 투자해 2013년 생산을 시작했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지난해 미얀마 가스전에서 6053억원 영업이익을 거뒀다. 미얀마 가스전을 통해서는 또 국내 업체들이 생산 플랫폼 등 총 14억 달러(1조7000억원)어치 시설을 수주하는 부수 성과도 올렸다.

SK이노베이션은 브라질 해상광구 3곳을 2011년 덴마크 머스크오일에 매각했다. 금액은 24억 달러(2조9000억원)였다. 지분 매입에서 시설 투자까지 총 7억5000만 달러를 들여 상당한 매각 차익을 얻었다. 반대로 머스크오일은 한국의 공기업들처럼 한창 비쌀 때 사들여 큰 손해를 입게 됐다.

성공 스토리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실패가 많았기에 석유공사 등은 엄청난 빚을 지게 됐다. 전문가들이 꼽는 실패 요인은 크게 둘이다. 하나는 사업 역량이 모자랐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에너지 안보 실적을 높이려 지나치게 서둘렀다는 점이다. 인하대 신현돈(자원공학과) 교수는 “자원개발률 같은 목표를 세우되, 국제유가 등을 살펴 속도 조절을 해가며 자원개발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혁주 논설위원